신뢰를 만드는 경청의 힘
신뢰를 만드는 경청의 힘
입력 : 2022.09.05 03:00 수정 : 2022.09.05. 03:05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당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평범한 질문 같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더 나은 삶 지수’ 보고서에서 사회적 연계를 측정할 때 쓰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일단 안심해도 좋을 듯하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속할 공동체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 지수 2020’ 보고서에서 한국은 80%가 그렇다고 답하여 41개국 중 38위를 차지했다. 다섯 명 중에 한 사람은 그런 도움을 구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OECD 평균(91%)보다 11% 낮고, 세계에서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실제로는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을 임명하여 화제가 되었던 영국(93%)보다 13%나 낮다.
2020년 한국 인구수가 5178만명이었으니 아주 단순화시켜 말해본다면 최소 1000만명 이상이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더 난감한 건 이것도 개선된 수치라는 점이다.
2020년 이전에는 70%대를 기록하며 여러 차례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런 현실은 다른 간접지표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2018년 한국리서치의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부양가족이 많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이에게 임금 차이를 두어 좀 더 보상해주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각각 58%와 69%에 이르는 응답자들이 차이를 둘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개인에게 닥친 어려움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 ‘자기책임의 윤리’가 지배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자기책임의 윤리’의 지배가 사회적 신뢰의 저하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를 보면 한국에서 ‘대인신뢰도’는 2014년 73.6%를 기록한 이후 점점 하락하여 2021년엔 59.3%까지 떨어졌다.
코로나 시기를 고려해 그 이전을 보더라도 2019년 66.2%로 떨어졌다.
이런 신뢰의 하락은 다른 지표에서도 볼 수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 자료를 활용해 2015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내놓은 결과를 보면,
자녀에게 가르칠 만한 내용 중 관용성과 타인 존중을 꼽은 한국인은 45.3%밖에 되지 않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000달러도 안 되는 국가까지 포함된 이 조사에서 우리는 52개국 중 52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충분한 관용과 존중 없이 구성원 간 신뢰가 저하하는 사회에서 ‘자기책임의 윤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정치가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곳에선 타인의 의견이나 처지를 속단하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사회적 단절이 더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도움을 호소할 곳을 더욱 더 찾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당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더 나은 삶 지수’에서 사회적 연계지표이면서 사회적 고립,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측정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겠지만, 외롭다는 말의 가장 깊은 속엔 도움이 없다는 현실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서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일상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있을까?
개인적으론 ‘주변 사람들의 말을 성실히 귀 기울여 듣는 일’, 경청이라 생각한다.
언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가 닿는 데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한 사람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성실히 듣는 일은 타인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다.
생각해보면 미카엘 엔더의 소설 <모모>에서 모모가 가진 재주라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동네 사람들의 말을 인내하며 열심히 들어주는 일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모모에게 가봐!”
다투던 사람들조차 경청하는 모모를 통해 다시 연결된다.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이를 두고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고,
이제 ‘공동체란 경청하는 집단’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공동체를 상실했다면
그건 우리가 ‘경청’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팬데믹과 이어진 경기침체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절실한 지금,
우리 정치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원인 역시 난무하는 적대만 있을 뿐 서로를 경청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회적 고립외로움경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