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에 좌우되는 법과 원칙
기분에 좌우되는 법과 원칙
입력 : 2023.02.21 03:00 수정 : 2023.02.21. 03:04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며칠 전 전국 73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행정안전부의 비영리 민간단체 전수조사’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월 초 행안부가 전수조사 계획을 발표하며
단체별로 회원 정보부터 회계 자료까지 일괄 제출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기 때문이다.
비영리 단체를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해 개별 단체 정보 현행화를 하겠다는 조사 의도는
언뜻 합리적인 이유를 가진 것처럼 보였으나, ‘기분’에 좌우되는 충동적 행동으로 느껴졌다. 가령, 개별 비영리 단체마다 요구하는 자료의 종류와 범위가 다르고,
행정 소통 방식과 제출 시기조차 제각각이었다.
손발 안 맞는 ‘충동’의 흔적들뿐이었다.
관청에 이미 제출한 서류를 다시 제출하라 하고,
조사 대상자를 엄밀하게 선정하지도 않고,
전수조사의 법적 근거조차도 마땅히 없는 채 강행되는 기이한 조사 태도는
막대한 행정력이 법과 원칙에 기반하지 않고 기분에 좌우되는 모습이었다.
우왕좌왕 전수조사는 계획 없는 급조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1주일 전, 제57회 국무회의를 주재한 대통령은 ‘소수의 귀족노조가 다수의 조합원과 노동 약자를 착취하고 약탈하는 구조’를 우려하며, 그 해결책으로 ‘노조 회계의 투명성 확보’를 주장했다. 이어서 민간단체에 대해 말했다.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조금이 그들만의 이권 카르텔’에 쓰인다고 우려하며,
‘회계 사용처를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투명성을 강조했다.
대통령비서실장, 서울시장, 관계부처 장관이 다 모인 회의에서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는 순식간에 ‘공적 자금’을 탈취하는 공공의 악마처럼 묘사되었다.
대통령의 기분이 드러난 후 조사가 급조되었다.
행안부 공무원들도 알 것이다. 우려와 현실이 다르다는 점을.
이미 지자체 혹은 정부로부터 국가보조금을 받는 사업은 까다로운 선정 절차를 거치고, 선정 이후에도 담당 공무원과 소통하며 양식에 맞는 회계 처리를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조금 사업 회계는 전수조사 한참 전부터 공적 관리·감독의 대상이다.
만일 대통령 우려처럼 ‘귀족노조’나 ‘이권 카르텔’을 키우는 데 돈이 들어갔다면,
관계 법령에 의거하여 제재받고 환수 조치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행정력을 과도하게 남용하고, 조사 대상자를 기준 없이 선정하고, 중복되는 조사 자료를 요구하는 이번 전수조사는 아무리 봐도 ‘기분파’다.
당장 행정조사의 기본원칙에도 위배되는 ‘법과 원칙’에 동떨어진 지침이다.
더구나 공정한 법과 원칙, 투명성과 책무성의 강조 아래 이루어지는 조사가
정작 법과 원칙을 벗어난 수준에서 민감한 개인정보를 수집하거나 감시할 것까지 예고하는 현실을 보면, ‘법치주의’가 아니라 ‘기분주의’ 시대에 사는 것 같다.
법치주의적 공정성·투명성·책무성이 행정의 최우선 가치라면,
당장 부동산 정책을 담당하는 관계부처의 의뭉스러운 결정부터 전수조사하길 바란다.
‘둔촌주공 구하기’에 투입된 특례보금자리론,
미분양 아파트 고가 매입 등에 지출된 세금 수조원이야말로 조사가 필요하다.
왜 건설사 부양에 소진된 막대한 공적 자금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기분이 작동하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