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
입력 : 2023.03.02 03:00 수정 : 2023.03.02. 03:05 인아영 문학평론가
바야흐로 아이돌도 스토리텔링이 관건인 시대다.
4세대 아이돌 걸그룹의 지형도는 유독 스토리텔링이 각축하는 장이다.
레퓨지아라는 통제 도시에서 마법의 땅인 언노운을 향해 모험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세라핌의 ‘크림슨 하트’나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자 인공지능인 아바타를 만나서 블랙맘바를 물리친다는 서사를 가진 에스파의 ‘광야’와 같은 세계관이 그 좋은 사례다. 이 와중에 뉴진스는 순수하고 청량한 10대 소녀들이라는 뚜렷한 콘셉트에 비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스토리텔링이나 세계관이 비교적 풍부하지는 않은 편이다.
이를 두고 도우리 작가는 한 칼럼에서 어려운 집안에서 고생하며 자수성가했다는 극복 서사로 대중의 호감을 얻었던 과거 아이돌과 달리 오늘날 아이돌은 그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돈이 많고 집안도 좋으면서 똑똑하고 스펙도 좋았던 게 ‘셀링 포인트’가 된다”고 지적한다. 그에 더해 부유하고 학벌 좋은 집안에서 구김살 없이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아비투스까지 재현해야만 대중들이 열광하는 스타가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을 충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돌의 전략만은 아니다.
비싼 사교육을 받는 대신 그저 학교 내신에 충실했던 것이 수능만점의 비결이었다는 겸손이 덕목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교수인 부모의 똑똑한 머리를 물려받았을 뿐이라는 쿨한 인정이 공감받는 시대다.
한 개인의 노력 정도로는 따라잡을 수도 대체될 수도 없는,
부모의 배경과 태어난 조건의 힘이 확인되고 재생산되는 서사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성이 소지한 명품이 진품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논란이 되었던 맥락 중 하나는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 행세를 하는 사람에게 ‘속았다’라는 억울함이었다. 그것이 억울한 일인 까닭은 관심 경제의 시대에 돈이 많은 사람이 받는 주목과 혜택의 위계를 당연하게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이 환상이던 시절도 있었다.
박완서가 <도둑맞은 가난>에 적었듯, 부자들이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하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가난까지 도둑맞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노골적으로 부유함을 선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심리적인 박탈감을 유발하거나 경제적인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 평등감각이 아니다. 점점 더 공공해지는 세습의 사다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생각 없이 믿게 만드는 안전감각이다.
여기에는 어차피 안 될 것이니 굳이 애쓰고 싶지 않다는 포기의 심리가,
더 나아가서는 나도 불가능해보이니 비슷한 위치에 있는 너도 위계에서 이탈하지 말고 똑같이 복종하길 바라는 불안의 심리가 깔려있다.
부유함이 잘 보이게 된 만큼 가난함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빈곤은 이제 영화 <기생충>이나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처럼 동경의 대상이 되는 부잣집 혹은 일확천금의 행운과 대비되는 대립항으로서, 기어코 그 비참한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지 여부만이 관건이 되는 극단적인 밑바닥으로만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빈곤 현상을 연구해온 인류학자 조문영은 저서 <빈곤과정>(글항아리, 2022)에서 주가와 부동산에 이익만 된다면 쓰레기 소각장, 축사, 심지어는 복지기관까지 ‘혐오시설’이라고 부르며 “빈곤과 물리적 거리 두기에 안간힘”을 쓰는 이 사회에서는 빈곤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빈곤이 보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부유한 이들의 매끄러운 세습 서사에 익숙해진 우리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