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금단의 이름 '박원순', 봉인을 열어야 한다

닭털주 2023. 7. 15. 19:33

금단의 이름 '박원순', 봉인을 열어야 한다

 

이명재 에디터

 

 

오늘, 그 어느 날보다도 오늘, 철저히 잊혀지고 있는 어떤 이의 죽음을 떠올린다. 아니, 그의 이름을 망각하는 것이 하나의 의무처럼 부과되고 있는 어떤 이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3년 전 오늘(9) 그의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하루아침의 죽음, 우리를 엄습했던 것 이상으로 그 자신을 한순간에 덮쳤던 죽음. 그리고 그의 삶을, 그와 더불어였던 이들이 함께 이뤄내 보려고 했던 것들을 생각해 본다.

 

말소 · 삭제된 그의 삶과 성취

 

3년 전 오늘, 저녁에 돌아올 사람처럼 아침에 배낭 매고 집을 나서서 그가 삶의 마지막 시간을 걸을 때 그와 함께했던 것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실행할 때 그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숲속 나무들의 비통한 침묵과 그 죽음을 다급히 만류하려는 산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먼 여행의 길을 떠나듯, 아니면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듯 그는 단 한마디 이별의 말도 없이, 헤어짐의 짧은 순간도 없이 사람들 곁을 떠나 홀로 지상의 자신과 이별했다.

 

그렇듯 너무도 순식간에 닥쳐온 그의 죽음은 부고장 없는 장례였다.

그것은 죽음이라기보다 한순간의 소멸이었고,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일거의 '말소'였다.

말소, 삭제된 그의 이름은 지금 금단이 돼 있다.

함께였던 이들에게도 마치 이단의 부호처럼 봉인돼 있다.

 

다만 도처의 흔적들이 그를 '증언'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좀 더 무력하게 헐리고 밀려났었을 서울의 골목골목을 거닐 때면, 마을마다에 열린 도서관들 중의 어느 한 곳에든 들어가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들을 때면, 그리고 어제 저녁 내가 벗들과 함께 서울 성곽길의 야경을 밟으면서 삶은, 사람의 도시는 결코 일시에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임을 새삼 확인할 때처럼 이 도시의 곳곳에, 그 도시의 밤과 낮에 스며 있는 그의 자취를 느낀다.

 

서울 경복궁 맞은편에 새롭게 펼쳐진 넓은 녹색 공간, 도심 한복판 옆 빌딩 숲 사이에서 휴식과 나들이를 즐길 때, 100년이 넘게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그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던 이 금역(禁域)의 땅에 들어와 보는 것만으로도 각별한 감상에 젖을 때, 일제 총독부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차지였던 곳에서 해방 이후에는 미국 대사관 숙소로, 그리고 수백 년 궁궐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호텔이 들어설 뻔했던 이곳이 '송현 공원'이 돼 거닐 수 있게 된 것에, 권력에서 권력의 손으로 넘어가며 내내 금역이었던 이곳이 다시 또 다른 권력의 소유로 넘어가지 않은 것에 그 도시의 주인된 시민으로서 다소의 감회가 일 때, 우리는 그를 한번은 생각게도 되는 것이다.

 

그가 지키려 했던 많은 것들로 인해 도시가 좀 더 '사람의 마을'로 돼 온 것에, 직선투성이로의 팽창 속에서 무너지고 잘리고 깎여나갔던 도시, 그 속의 사람들의 삶이 함께 잘리고 깎여나갔던 도시에서 힘이 없는 이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서울에서의 나날의 일상에서 거듭 거듭 확인할 때 그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지금 금단과 이단으로 용납되지 않고 있으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오로지 성토와 규탄으로써만으로 허용되고 있다.

 

금단과 이단의 이름, 그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 불러내야

 

이제 그의 이름을 밀폐하고 있는 봉인을 뜯어내야 한다.

'박원순'이라는 이름을 휘감고 있는 그 두터운 장막을 벗겨내야 한다.

그 이름의 호명은 단지 그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의 명예와 복권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로의 추앙을 위해서는 더더욱이나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그를 덮고 가두고 있는 봉인과 장막은 그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64년 생애 중의 40여 년의 삶, 그 시간은 그의 삶이자 그와 한 시절을 함께 살았던 우리들의 삶이기도 하다.

그는 새로운 생각, 온갖 '처음'의 발상지였다.

그는 큰 강물이기보다는 시냇물로, 샘물이고자 했다. 끊기지 않고 솟아나는 샘, 길어도 길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되고자 했다. 그로부터 많은 미답과 미지의 것들이 그 문을 열었다. 최소한 그런 미답과 그곳으로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의 머리와 가슴으로부터 조목조목의 타파와 혁신이 나왔다.

그가 무엇보다 보여주고 입증하고자 했던 것은 희망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희망은 제작하는 것이라는, '희망 제작'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성취는 그의 성취이자 그와 함께한 이들의 성취였다.

사람들이 박원순과 함께 이뤄낸 것이었고, 박원순을 통해 이뤄낸 것이었으며,

그리고 다른 많은 '박원순들'이 이뤄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은 결코 그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비극의 씨앗, 그 진실의 미궁을 밝혀내는 것이 그의 명예 이전에 진실의 진실로의 길을 가기 위한 것, 진실의 명예를 위한 것이듯이. 그리고 그의 삶, 그를 통한 우리의 삶은 그 '사건'의 진실의 미궁을 밝혀내는 것 이상의 것이므로.

 

그의 삶과 이름을 밀폐한 봉인을 뜯는 것,

그의 이름을 부르는 용기를 내는 것은 그를 위한 용기가 아니다.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용기인 것이다. 남은 모든 이들의 명예를 위해서인 것이다.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 그것은 그를 통해 보냈던 수십년 간의 시간, 그를 통해 이뤄내려 했던 것을 더욱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서다. 기억을 넘어 미완의 성취를 또한 온전히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많은 것들이 부숴지고 넘어지고 있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그 미완을 더욱 제대로 우리의 미완으로 삼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박원순'이라는 이름을 덮고 있는 봉인,

아니 박원순이라는 그 봉인을, 우리는 우리의 이름으로 뜯어내자.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