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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도 ‘각자도생’하란 말인가 [아침햇발]

닭털주 2025. 1. 13. 19:53

초고령사회도 각자도생하란 말인가 [아침햇발]

황보연기자

수정 2025-01-12 18:51 등록 2025-01-12 15:28

 

황보연 | 논설위원

 

 

75살 이상 고령자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가 국회를 통과했다.

이름하여 플랜 75’. 복잡한 심사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고 가족의 동의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본인이 신청하는 즉시, 준비금 10만엔(93만원)이 주어진다. 안락사를 돕고 화장장도 제공한다.

처음에 반발하던 국민들도 곧이어 순응했다.

국가의 재정 부담과 확산되는 노인혐오 범죄를 해결할 묘수라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정부는 플랜 65’로 대상 연령을 낮추는 방안까지 검토한다.

 

얼핏 듣기만 해도 섬뜩한 이야기는 일본 영화 플랜 75’에 나오는 가상의 제도다.

영화는 안락사 케어라는 극단적 소재로 일본 사회에 만연한 초고령사회의 위기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자신의 사회적 쓸모를 증명해보이고 싶었던 78살의 주인공 미치는 실직과 퇴거 명령, 동료의 고독사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끔찍한 최후에 대한 공포는 그를 기어이 플랜 75에 순응하게 만든다.

 

일본은 2005년에 인구의 20%가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들어섰다. 이른 고령화로 그에 적응하기 위한 채비도 빨랐지만 일본 사회의 위기의식은 여전하다.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인식은 고령자를 더 움츠리게 한다. 일본은 75살 이상을 후기 고령자로 부르며 상대적으로 젊은 노인과 분리해 정책을 펴고 있는데, 플랜 75의 신청 기준은 이를 빗댄 것이다.

 

 

지난해 국내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랜 75’의 포스터. 2022년 일본 개봉 당시, 영화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고령 관객 비중이 유독 높았는데 상영이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말없이 스크린을 응시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찬란 제공

 

우리는 어떤가. 어느덧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고령화사회(노인이 인구의 7% 이상)초고령사회로 진입하기까지 프랑스와 독일은 각각 154년과 76,

일본은 35년 걸렸는데 우리는 24년 만에 도달했다.

전속력으로 늙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위기감은 일본을 따라가기는커녕 한참 뒤처진다.

지난 연말 한 정부 부처의 호들갑스러운 초고령사회 진입발표는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모양새였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1224일 보도자료를 내어, 전날 주민등록 인구 기준 65살 이상이 전체의 20%를 넘었다고 공표했다. 곧이어 언론은 이를 앞다퉈 속보로 보도했다.

통계청은 장래인구추계에 따라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이 추정된다고 전망해왔다.

행안부가 이를 염두에 두고 12월 한달 내내 일자별로 살피다가 20.00%에 도달하자마자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이다.

공식 인구 지표는 실거주 기준으로 조사하는 통계청 인구총조사다. 이런 점은 차치하더라도 굳이 인구 구조의 변동 상황을 일 단위로 파악할 일이었는지 의문이다. 행정 서비스 제공이 목적인 주민등록 인구는 원래 매달 1, 직전달 기준 현황을 누리집에 게시한다.

 

정작 관심이 가는 정부의 중장기 전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듯이 초고령사회 진입을 온 국민에게 각인시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회성 반짝 관심이 아니라 긴 안목의 정책이 아닌가.

당장 가시적 성과를 내기 어려운 기후위기가 정치권의 우선순위가 아닌 것처럼

매우 느린 속도로 문제가 누적되는 고령화도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하지만 앞으로는 시간이 많지 않다.

지난해 65살 이상 인구는 1천만명을 넘어섰고

취업자도 60대 이상이 가장 큰 비중인 역피라미드 구조가 됐다.

2045년엔 노인이 인구의 37.3%로 일본도 추월할 전망이다.

의학계에선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돌봄 요구가 본격화되는 연령을 77~78살 정도로 본다.

현재 노인 장기요양 등급을 받은 65살 이상이 약 106만명(2023년 기준)인데,

올해 51~70살인 베이비붐 세대(1636만명)가 후기 노인이 될수록

이 규모는 가파르게 늘어난다.

 

우리의 정책 대응은 걸음마 수준이다.

노인 빈곤은 유독 심각하고 노후소득의 근간이 되어야 할 공적연금은 빈약하다.

돌봄에 대한 국가 책임도 미흡하다.

연금개혁과 정년 연장,

노인연령 조정 등의 과제는 정부 업무보고 문서나 대선 공약에서만 반복적으로 오르내린다.

중장기 정책 방향을 세우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일엔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세수 기반 약화와 긴축 재정 기조는 초고령사회에 역행하는 정책 방향이다.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일본 못지않은 혐로사회가 될 수 있다.

플랜 75’를 만든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사회적 불만과 분노가 (그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를 향하는 게 아니라 약자인 고령자에게 향하기 쉽다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다고 했다.

초고령사회를 대비하는 것은 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누구나 나이가 든다. 초고령사회도 각자도생으로 맞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