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사과를 아낄 이유 있나요 [똑똑! 한국사회]

닭털주 2025. 2. 23. 10:31

사과를 아낄 이유 있나요 [똑똑! 한국사회]

수정 2025-02-19 20:39 등록 2025-02-19 19:17

 

 

게티이미지뱅크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쨍그랑. 바닥으로 미역국과 그릇 조각이 한데 엉켜 흘러내린다.

뒤에 다른 사람이 대기하는 줄 모른 채 식당에서 국그릇을 들고 뒤돌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도 안 다쳐서 다행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소하지만 사건은 벌어졌고 상황은 나빠졌는데 한마디 말이라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으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들을 주워 담으며 문득 요즘 사과나 감사를 듣기가 참 힘든 세상이 되었더랬지 싶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크건 작건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마주 걸어오는 사람과 어깨가 서로 부딪는 가벼운 실수부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타인에게 손해를 끼쳐 법정에 가는 의도적인 잘못까지, 우리 사회는 단 하루도 조용하지 않다.

하지만 실수와 잘못 이후에 사람들의 모습은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나는 느낀다.

사소한 실수에도 어느 쪽도 먼저 말하지 않는다.

미안합니다라는 단 한마디를 말이다. 오히려 서로 눈치를 먼저 본다.

상황을 미루고 피하다 보면 시간 지나면 잊히리라 여기는 듯하다.

어릴 적 소풍에서 반 친구들과 함께했던 단체놀이인 수건돌리기 같다. 둥글게 마주 보고 둘러앉아 맞은편 친구의 표정을 살피며 혹시 등 뒤를 지나가는 술래가 혹시 내 뒤에 몰래 수건을 놓고 가지는 않았는지 눈치 보는 초조함이 서로 닮았다.

 

사과는 패배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과하면 진다고 착각하나 보다.

누구나 실수와 잘못을 할 수 있다.

오히려 잘못으로부터 더 나은 방법과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이 인간이 성장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일단은 잘못이나 실수를 사과해야만 해결책 마련과 극복, 차후 반복 방지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가장 소중한 자원인 시간을 아끼려면 사과는 빠르고 담백할수록 좋다.

하지만 오늘날 옷차림도 행동도 매끄러운 사람은 많아도 솔직한 사람은 드물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문장들처럼, 언뜻 그럴싸해 보이지만 본질은 희미하다고나 할까. 이 뜻인지 저 뜻인지 알 수가 없는 두루뭉술한 표현이나 언뜻 사과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남 탓과 상황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변명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무례함은 도로 위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쁜 출근 시간이 아니어도 도로 위는 사바나 초원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운전자가 가득하다. 사회에서도 자율에 동반되는 책임은 회피하면서 어떤 상황이든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여 본인의 잘못이나 실수는 없었던 일로 무마하려 한다. 심하게는 서로를 무슨 충, 즉 벌레라 부르며 멸시하는 풍조까지 생겼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끼리 토닥거릴 때도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확대되기 일쑤다.

아이들은 어느새 사과하지 않는 법을 배워버렸다.

감사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마음 표현이 어려운 수줍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타인과 사회의 호의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보인다. 예의가 실종된 이 모습은 대다수가 이미 그렇기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도 자녀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간섭하고 수발을 들어주는 부모 때문인지, 교육 전문가도 사회학자도 아닌 평범한 엄마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연습이나 체험판도 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오로지 실전뿐인 가혹한 전장이다. 이웃이나 동료, 가족, 하다못해 길 가다 마주친 시민과 싸우고 이겨서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는 옹졸한 게임 미션 따위는 당연히 없다.

타인에 대한 감사와 사과는 빠르고 솔직할수록 좋다.

인생을 투쟁의 연속이라 부른다면 투쟁 상대는 내가 처한 환경과 과거의 나 자신이다.

고전 소설 속에서도 아무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살아가는 밋밋한 인물보다는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고 상처를 감싸안아 단단해진 인물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니 인생은 더 나은 존재가 되고픈 자신과의 투쟁 기록이 아닐까.

과연 어른들은,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