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는 솔직히 괴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말 짜릿하고 재밌어요
소설 쓰기는 솔직히 괴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말 짜릿하고 재밌어요.
절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마지막엔 예상 못 한 곳에 도착해 있는 게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강보라 작가
들어가며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
그 불확실성에 기꺼이 이끌리는 사람.
4월의 햇살 아래, 강보라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Q.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약 15년간 라이프스타일 잡지 업계에서 에디터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독립 에디터로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소설도 함께 쓰고 있어요.
Q.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바우어의 정원』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계신데요, 최근의 근황과 소회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한동안 집에서 작업하며 집순이처럼 지냈는데, 이번 수상 덕분에 모처럼 분주한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인터뷰도 하고, 북토크도 하고, 유튜브 영상도 찍고요. 사실 예전에는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고 평가받는 게 약간 스트레스였어요. 좋은 평가조차도 때로는 압박으로 다가왔거든요. 그래서 주목받는 게 좋으면서도 싫고, 싫으면서도 좋은, 그런 양가적인 감정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상을 계기로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다양한 피드백을 접하는 것 자체가 작가에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또 독자들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짚거나, 오히려 그 이상을 읽어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요즘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작가는 대중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예요. 이번 상을 통해 그걸 느꼈습니다.
Q. 『바우어의 정원』에는 새틴 바우어라는 새가 상징적으로 등장합니다. 겉보기엔 모두 파란색이지만 제각기 다른 물건들을 모으는 독특한 습성을 가진 새인데요. 이런 새를 작품에 모티프로 도입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목도 처음부터 정하고 쓰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작년에 초고를 쓰다가, 드라마 치료 워크숍에 참여한 내담자들의 특성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문득 새틴 바우어라는 새가 떠올랐어요.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있었는데,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예술적인 집을 짓는 새였죠. 그 아름다움이 사실은 짝짓기를 위한 전략이라는 점, 그리고 짝짓기 후 암컷을 괴롭히다시피 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그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이 공존하는 양면적인 모습이, 자기 상처를 은밀하게 내재화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 앞에 전시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 닮아 있다고 느꼈고요.
저는 보통 제목을 먼저 정하고 글을 쓰는 편인데, 이 작품은 예외였어요. 초고를 쓸 때 계속 헤맸던 이유가 제목이 안 떠올라서였던 것 같아요. 원래 제목은 ‘박수는 조금 있다가’였고, 새틴 바우어 모티프가 점점 작품을 장악하면서 『바우어의 정원』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Q. 이전 작품들에는 이국적이고 낯선 배경이 많이 등장했는데요, 이번 『바우어의 정원』에서는 ‘민트색 모닝’이라는 폐쇄적인 공간 배경이 인상 깊었어요. 이렇게 공간을 설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또 창작하실 때 공간, 인물, 사건 중 무엇을 먼저 떠올리시는지도 듣고 싶어요.
예전 작품에서는 티니안, 우붓, 샌프란시스코처럼 주로 해외, 그것도 여름 배경을 자주 썼어요. 근데 이번엔 일부러 반대로 가보자고 생각했어요. 여름이 아닌 겨울, 해외가 아닌 국내, 1인칭이 아닌 3인칭, 여러 날이 아닌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요. 제가 늘 써왔던 설정에서 일부러 멀어지고 싶었어요. 일종의 창작 훈련처럼요.
민트색 모닝이라는 자동차 공간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봉준호 감독과의 대담에서 “자동차 안의 시간은 지점 A에서 B로 향하는 한시적인 여정이기에, 오히려 중요한 말을 끌어내는 힘이 있다”고 말한 게 인상 깊었거든요. 또 차 안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대사가 될 수 있죠.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많은 『바우어의 정원』과 잘 맞는 공간이라고 느꼈어요.
창작의 출발점은 보통 어떤 인물, 공간, 사건보다는 ‘한 장면’인 경우가 많아요. 소설의 전체 분위기나 문체를 결정짓는 장면이 먼저 오고, 거기서 나머지 요소들이 파생되는 식이죠.
Q. 작가님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처를 마주하죠. 이번 작품의 드라마 치료 워크숍 장면도 그런 예 중 하나였는데요. 이런 설정은 어떻게 떠올리게 되셨는지, 또 상처를 가진 인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저는 보통 단편을 쓸 때 하나의 질문을 떠올리는 편인데, 이번엔 “트라우마는 극복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시작이었어요.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연극 치료 워크숍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내담자들이 무대에서 자기 상처를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그걸 보면서 예전에 잡지 기자로 일할 때 봤던 오디션 장면이 떠올랐어요. 그때도 배우들이 자신만의 사연을 꺼내는데, 감동적이면서도 약간의 서늘함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자기 이야기를 ‘헐값에 파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꼭 그렇게 말로 다 꺼내야만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생겼고, 결국엔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트라우마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가?”, “그걸 자기만의 것으로 내재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요.
그래서 은화라는 인물도, 굳이 소설 안에서 어떤 직접적인 수모를 겪지 않게 하고 싶었어요.
예전에 읽었던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라는 소설 속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구절이 떠올랐거든요. 저도 은화의 비극을 어떻게든 시적인 언어로 감싸고 싶었어요.
Q. 초원이라는 인물은 은화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존재이지만,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하진 않죠.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물을 등장시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떤 독자분이 “정원에서 초원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리뷰를 써주신 걸 봤는데, 정말 감동이었어요.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은화가 개인의 정원에 갇혀 있다가 초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바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해석이 너무 잘 맞더라고요. 그래서 초원을 직접 등장시키기보다, 은화가 초원을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을 통해 그 변화와 확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초원은 처음에 주인공으로 설정된 인물이었어요. 초고에서는 초원이 학폭 피해자였고, 무재가 일하는 연기학원이 주요 배경이었어요. 은화는 마지막에 카메오처럼 잠깐 등장했죠. 그런데 쓰다 보니, 초원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은화의 이야기, 즉 ‘정원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중심 인물이 바뀌면서 초원은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남게 되었어요. 참고로 ‘원초원’이라는 이름은 앞뒤가 같은 회문 구조이기도 한데요.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에게 좋은 청자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었습니다.
Q. 잡지사에 다니던 시절, 출근길마다 책을 읽으셨다고 들었어요. 그 시간이 쌓이며 결국 소설을 쓰게 되셨다고요. 당시의 계기와, 지금까지 소설을 계속 쓰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또 신작 계획이 있다면 살짝 들려주세요.
출근길 지하철에서 소설을 읽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어요. 좋은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뭔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르는데, 늘 그럴 때쯤 회사에 도착하곤 했죠. 그렇게 15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제 안에 뭔가가 찰랑찰랑 고였던 것 같아요. 처음엔 그게 시인 줄 알고, 퇴근 후 작업실에 가서 시를 써보기도 했는데, 일주일 만에 ‘재능이 없구나’ 하고 빨리 깨달았죠. 저는 저한테 재능이 없는 걸 빨리 깨닫는 재능이 있거든요. 그렇게 처음으로 소설을 써봤는데, ‘이거 내 맥박이랑 잘 맞는다’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쓴 첫 작품이 운 좋게 등단작이 되었고요.
등단 이후에는 방황도 있었어요. 습작 기간 없이 바로 등단하다 보니 부담이 컸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어요. 그런데 결국 “소설 안 쓰면 뭐 할 건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소설 쓰기는 솔직히 괴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정말 짜릿하고 재밌어요. 절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마지막엔 예상 못 한 곳에 도착해 있는 게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소설을 꼭 써보라고 권해요. 요즘은 첫 소설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출간을 앞두고 있어요. 교정 마무리 작업 중이고, 이후엔 단편도 차차 발표할 예정입니다.
Q.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활동하셨고, 지금은 소설을 쓰고 계시잖아요. 에디터로서의 경험은 소설가로서의 시선이나 글을 읽고 쓰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등단작인 『티니안에서』는 잡지사에 다닐 때 티니안 여행 후 썼던 짧은 에세이에서 출발했어요. 처음 소설을 쓸 때도 새로운 배경보다는 이미 한 번 겪고 소화한 경험에서 시작하는 게 자연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에디터로서의 작업과 소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셈이죠.
미술관이나 갤러리 취재 경험이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같은 단편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고요. 반대로 에디터의 시선이 소설에 방해가 될 때도 있어요. 문화적으로 풍부한 사람들과 자주 접하다 보면 현실 감각이 흐려질 때가 있거든요. 그 균형을 고민하며 쓴 작품이 『빙점을 만지다』예요. ‘빙점’은 녹는 점과 어는 점 사이의 지점인데, 정신적인 가치와 자본주의적 가치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 역시 그 사이에서 늘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고요.
Q. 강보라 작가님의 삶에 영향을 준 책이 있다면 한 권만 소개해주세요.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요. 고민을 해보았는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추천하고 싶어요. ‘재미’야말로 소설의 가장 귀한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엔 너무 재미있어서 넷플릭스도 안 보게 되더라고요. 많은 소설가들이 ‘최애’ 책으로 꼽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독서IN 뉴스레터 구독자와 홈페이지 방문객 여러분께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한동안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았어요. 너무 익숙한 감정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뒤늦게 한국 소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동시대 작가들이 쓰는 문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뜨거운 감각적 기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일상생활이 얼마나 바쁜지, 책 한 장 읽기도 쉽지 않다는 걸 저도 잘 알아요. 그럼에도 많은 독자분들이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그 기쁨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꼭 제 소설이 아니어도 좋고… 제 소설이면 더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