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다

생의 절반

닭털주 2025. 6. 3. 11:20

생의 절반

이병률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 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 년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삼십 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고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생의 일일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