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한강, 서미애 그리고 김혜순
이슬기『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공저자, 칼럼니스트
입력 2024.10.22. 06:00
(왼쪽부터) 서미애 작가, 김혜순 시인, 한강 작가.
1994년 1월 28일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서막을 알린 날이다.
이날 있었던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상식에 한강은 소설 부문 당선자로 참석했다. 이날은 또 다른 작가, 세계의 탄생을 예고한 날이기도 하다. 시상식 기념사진 속 한강과 나란히 자리한 여성은 오늘날 ‘K-미스터리의 거장’이라 불리는 서미애다. 그는 그해 소설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으로 스포츠서울의 신춘문예 추리소설 부문 당선돼 한강과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올해가 딱 30년이다. 그간 두 여성 작가는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한강이 2016년 『채식주의자』로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하고, 2024년에 이르러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미스터리 소설 집필에 몰두한 서미애는 ‘K-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선구자가 됐다. 과학 수사 다큐멘터리 구성 작가로 일했던 그의 소설에는 다른 작품엔 없는 ‘디테일’이 있었고, 트릭이나 반전에 집중하는 대신 범죄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병폐에 주목했다. 그렇게 2010년 작 『잘자요 엄마』는 미국, 프랑스, 독일 등 16개국에 출간됐다. 그간 미스터리 소설 속 여성의 모습은 쉽게 ‘희생양’과 ‘팜므파탈’로 고착화돼 있었던 것에 반해, 그의 저작은 여성을 연쇄살인마와 탐정의 자리로 바꿔놓았다.
세계가 사랑하는 한국의 문인으로 김혜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국 최초로 그리핀 시 문학상(2010)과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2024)을 받았다. 그리핀 시 문학상 수상작 『죽음의 자서전』은 온몸이 감전되는 듯한 ‘삼차신경통’이라는 사적인 고통 속에서 세월호·메르스 등의 참상을 거치며 써 내려간 49편의 시다.
그는 시 속에서 “‘너’라는 인칭을 통해 세월호 같은 비극을 외부의 사건이 아닌, 함께 겪는 일로 드러냈다”(조재룡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는 평가를 받는다. ‘너는 언니다. 동생을 기른다/(중략)/동생의 시신을 바다에서 찾았습니다만/너는 네 시신을 찾았대 동생에게 말해준다/그러고도 같이 산다 꿈도 대신 꿔주고 친구도 만들어준다’(시 ‘동명이인’ 중)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에서 5‧18 당시 희생된 15세 소년 동호를 ‘너’라고 호명한 것을 두고 “30여 년 세월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걸음걸이”라고 했던 한강의 말과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너’라는 호명은, 비극의 현재성을 잃지 않으려던 그들 노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세 사람 모두는 시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강도 서미애도, 작품 활동의 시작은 시였다.(서미애는 198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김혜순은 1979년 계간지 『문학과지성』으로 데뷔한 이래 14권의 시집을 냈다. 시적인 단상으로 시작해 거침없이 당대를 묘파하는 정치성이 이들 글에는 있다.
한강이 ‘현재 진행형’의 역사인 5‧18 광주(‘소년이 온다’)와 4‧3 제주(‘작별하지 않는다’)를 정공법으로 다뤘듯, 서미애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남자’라는 단상에서 시작해 세월호 희생자들의 빈방을 담은 사진으로부터 소설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을 썼다. 김혜순은 1980년대 군부 독재부터 세월호, 메르스와 코로나 등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시에 불러왔다.
각각이 여성 서사를 보편의 영역에 올려놓았다는 점도 일치한다.
돌연 채식을 선언한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며 ‘육식’으로 표상되는 가부장적 질서를 통렬하게 비판한 한강, ‘여성 빌런’을 출현시켜 우리 사회의 모성 신화를 계속해서 질문하는 서미애, 한국문학에서 남성에 비해 늘 차별과 혐오, 폭력에 노출되어 온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김혜순까지.
지난 17일 한강은 노벨상 수상 이후 첫 공개 행보에 나섰다.
그는 지난 17일 열린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술도 커피도 여행도 하지 않는다며,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김혜순이 말하는 ‘시하다’가 생각이 났다.
김혜순은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시한다’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책 『여성, 시하다』 중)다. 시를 한다는 것은 내 안의 다른 생명을 꺼내놓는 행위이자,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리만큼 부단히 고통스러운 행위라는 뜻으로 나는 알아들었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45년. 글을 통해 여성과 인간의 자리를 물어온 한강과 서미애, 김혜순의 ‘글하는’ 삶이 나는 그러하다고 본다. 글은 항상 가장 멀리 가는 ‘최전선’의 장르이기 때문에, 그 덕에 그들은 즐거운 만큼 자주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의 ‘글하는’ 시간이 분투가 될지언정 고군분투는 아니기를, 독자로써 함께하겠다고 다짐해본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처 : 여성신문(https://www.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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