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중3 국어 수업 시간에 벌어진 일, 행복합니다

닭털주 2025. 1. 7. 14:34

3 국어 수업 시간에 벌어진 일, 행복합니다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던 마법 같은 순간

25.01.06 09:25l최종 업데이트 25.01.06 09:46l 김소영(summer7)

 

 

모든 이들이 충격, 공포, 경악, 처참, 슬픔으로 점철된 연말을 연대와 위로로 간신히 버텨나가는 작금의 시대이지만,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는 덕분인지 세상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해방될 때가 있다.

 

고입전형으로 기말고사가 11월 초반에 끝난 중3 학생들의 학교 생활은 수능을 끝낸 고3 학생 뺨친다. 필기구와 교과서가 없는 학생이 수두룩하고 아직 못 끝낸 교과서 진도를 나갈라치면 볼멘소리가 교실 천장을 뚫고 나갈 기세이다.

겨우 어르고 달래서 교과서 진도를 다 마쳤지만 졸업식은 아직 멀었고, 심야괴담을 보자고 조르는 아이들을 또 타일러서 조금이라도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될 시도를 이것저것 해본다.

 

그 시도 중 하나는, 국어 교사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선택의 가능성>을 모방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로 짓는 활동이다. 학기 초든 말이든 언제 해도 학생들 반응이 제법 괜찮다. 시는 아래와 같다(이 수업을 처음으로 만든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이하 생략)

 

빨리 이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못다 한 진도도 끝내야 하고 각 부서에서 전환기 중3 학생을 위해 마련한 여러 프로그램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지난주 목요일이 돼서야 겨우 한 반하고 이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평소 이 반은 나와 궁합이 잘 맞고, 정말이지 반의 모든 학생들이 예뻤던 터라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를 가득 안고 반에 들어갔다.

마침, 그날이 마지막 수업이었다.

평소 끊임없는 수다로 선생님들 혼을 쏙 빼놓는 겨울이(가명)가 웃으면서 "선생님, 정말 마지막 시간까지 진짜로 수업하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한다.

 

나도 웃으면서 가볍게 눈을 흘긴 후 준비한 활동지를 나눠주면서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언제가 가장 행복하니? 선생님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더라. 그럼 내가 뭐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야겠지? 활동지의 왼쪽 시 <선택의 가능성>을 참고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고 한 번 적어보렴. 대단한 걸 적는 게 아니야. 소확행 알지? 날 행복하게 하는 소소한 것들을 적어보는 거야. 다 적은 후엔 돌아가면서 낭송해 볼 거야."

 

아이들에게 안내한 후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을 주고 순회했다. 졸업이 코앞이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금세 집중했다. 어렵지 않은 활동이라서 하기 싫어하거나 평소 글쓰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학생이더라도 몇 줄 이상은 적는다.

 

 

<선택의 가능성>을 참고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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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모방시를 다 지은 거 같아 한 명이 자원해서 발표한 다음 그 사람이 지목해서 이어가자고 하니 서로 분위기를 살피다가 여름이(가명)가 손을 번쩍 든다. 다들 여름이에게 시선이 쏠리고, 여름이와 목하 열애 중인 겨울이도 여름이에게 집중한다. 여름이가 일어나서 본인이 꾹꾹 눌러쓴 시를 침착하게 낭송하기 시작한다.

 

몰티즈보다 러시안 블루를 더 좋아한다.

뼈보다 순살 치킨을 더 좋아한다.

새우깡보다 먹태깡을 더 좋아한다.

치킨보다 치킨마요 덮밥을 더 좋아한다.

돈을 모으는 것보다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잘 생긴 것보다 귀여운 것을 더 좋아한다.

간장게장보다 도토리묵을 더 좋아한다.

맨투맨보다 후드집업을 더 좋아한다.

드라마를 좋아한다.

자치회보다 방송부를 더 좋아한다.

콜라보다 사이다를 더 좋아한다.

패스트푸드보다 한식을 더 좋아한다.

...겨울이를 제일 좋아한다.

 

마지막 행을 낭송하자마자 학생들의 환호성으로 교실의 천장이고 유리창이고 다 날아갈 기세다.

교실의 온도가 확 오른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잠시 후에 학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 마디씩 한다.

 

"우와, 선생님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 다음 순서는 무조건 겨울이야!"

"우리 아무래도 이용당하고 있는 거 같아!"

"선생님, 이거 계속해야 되나요? 꺄아!"

 

평소 말이 많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반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겨울이. 친구를 존중하고 자신이 맡은 일을 야무지게 해내는 엄마 친구 딸의 전형인 여름이. 여름이와 겨울이는 수업 시간에 서로 놀리기 바빴는데, 어느 순간부터 알콩달콩 하며 예쁘게 사귀고 있는 이 반의 공식 커플이다.

 

둘 다 본업에 소홀함이 없는 학생들이고 워낙에 예뻐했던 학생들이라 항상 흐뭇하게 엄마 미소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날은 정말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는 순도 100%의 함박웃음을 가져다주었다.

 

누군가를 진실하게 좋아하는 마음, 그 마음을 조금은 수줍어하면서도 저렇게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 이 마음과 용기를 보고 탄성을 지르는 스물다섯 명의 순수한 영혼들. 그래, 너희들이라면 이 세상이 조금은 더 밝아지겠구나 싶었다. 이들이 더 전면으로 나서는 세상은 지금 같은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이겨내겠구나, 동트는 새벽을 맞이하겠구나 싶어 또 주책맞게 코끝이 찡했다.

 

교무실에 돌아와서 방금 일어난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던 일을 동료에게 한참을 얘기했다. 정말이지,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꼭 예전 텔레비전에 나오는 청춘 드라마 속의 선생님이 된 거 같다. 이제 주연인 청소년 배우는 아니지만, 그 옆에서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선생님 역할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언제나 이들과 함께 출연할 수 있어서 영광이고, 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하얗게 불태워야지.

 

이제 졸업식만 앞둔 우리 눈부신 존재들, 정말 졸업 축하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 너희들이 살아갈 무지갯빛 세상을 위해 선생님도 항상 깨어 있을게. 다시 한번 졸업 축하한다!

 

덧붙이는 글 | 여름이에게 다음 순서로 지목 당한 겨울이는 본인이 쓴 모방시를 낭송한 후 마지막에 여름이 이름을 부르고 손하트를 날리며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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