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경계선 지능을 위한 고교학점제

닭털주 2025. 5. 27. 10:34

경계선 지능을 위한 고교학점제

 

수정 2025.05.26 21:35

 

이범 교육평론가

 

 

 

경계선 지능이란 아이큐(IQ) 71에서 84 사이를 의미한다.

지적 장애는 아이큐가 70 이하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경계선 지능은 공식적으로 장애가 아니다. 하지만 학습이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초래하곤 한다. 그 숫자는 인구의 14%로서 700만명에 달한다. 참고로 나라마다 경계선 지능의 아이큐 범위가 다르게 설정돼 있다. 14%라는 비율은 한국의 경우 그렇다는 뜻이다.

 

요새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 수가 평균 20명이니 그중 3명 정도가 경계선 지능이다.

이들이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다음 중 어떤 학교에 제일 많이 진학할까?

1번 특목고, 2번 자사고, 3번 특성화고, 4번 일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3번 특성화고(직업계고)를 꼽을 것이다.

경계선 지능인 학생들은 학습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으므로 주로 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계선 지능인 학생들이 가장 많이 진학하는 학교는 일반고인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일까?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이유가 있다.

첫째로 특성화고 진학자가 먼저 정해지고 나서 일반고 진학자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특성화고는 특목고, 자사고와 더불어 전기고등학교로 분류된다. 전기에 불합격했거나 아예 지원하지 않은 학생들이 후기고등학교, 즉 일반고에 진학하게 된다.

둘째로 특성화고 정원이 과거보다 훨씬 줄었기 때문이다. 전체 고등학생 가운데 직업계 고등학생의 비율은 198045%에 달했으나 2000년에는 36%, 2020년에는 18%로 줄었다. 최근엔 14~15%가량이다. 교사들이 중학교 성적 하위권인 학생들은 특성화고보다 일반고에 더 많이 진학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배경이 이러하다.

 

일반고의 옛 명칭은 인문계고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고등학교는 인문계와 실업계로 대별됐다. 실업계(實業系)라는 명칭은 실용적인 직업교육이 이뤄지는 곳임을 바로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인문계(人文系)란 무엇일까? 영어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학문적(academic) 고등학교다. 그렇다면 한국은 아카데믹한 교육이 적성에 맞는 학생이 80%를 훌쩍 넘는 대단히 특이한 나라란 말인가?

참고로 2022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7%의 고등학생이 직업교육을 받는데, 한국은 절반 이하다.

 

인문계고는 2006일반계고, 2010년에 일반고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러나 교육과정이나 교과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결국 아카데믹한 교육이 적성에 맞지 않는 학생들이 아카데믹한 고등학교의 교실에 상당수 앉아 있게 된 것이다.

이른바 일반고 살리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특목고·자사고 때문에 일반고가 황폐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영재학교, 특목고(마이스터고 포함), 자사고를 다 합쳐도 중학교 졸업자의 약 5%로서 학급당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일반고의 황폐화는 서울 등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인문계고(일반고)의 문턱이 지나치게 낮아진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일반고 재활, 진입 문턱 높여야 가능

 

1990년대 중반에 교실 붕괴라고 불렸던 현상에서 이미 전조가 나타났다.

특목고·자사고 때문에 일반고가 황폐화되었다는 주장은

혁신학교로 지정되면 학력이 저하된다는 주장,

한 줄 세우기가 과열 대입 경쟁의 원인이다라는 주장과 더불어

한국 교육계의 삼대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일반고의 재활은 어떻게 가능할까?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유럽의 경우를 참조해 일반고의 진입 문턱을 높이는 것이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중학교 일반교과 성적이 일정 수준에 미달하면 일반고(인문계고) 진학이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도 일례로 제주시에서는 대략 중학교 성적 하위 3분의 1가량은 시내 일반고 진학이 불가능하다.

아카데믹한 교육과정을 따라오기 어려운 학생은 아예 진학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교실 붕괴황폐화는 자연히 예방된다.

 

두 번째 방법은 미국의 경우를 참조해 보다 다양한 교과목과 프로그램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미국의 고등학교에는 여러 선택과목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필수과목도 일반(regular)과 심화(honors) 중에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더해 직업계 과목이나 프로그램도 선택할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은 직업계 고등학교가 일부 대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그 대신 일반고에서 직업교육 프로그램이나 직업교육 교과목까지 제공한다. 물론 그러다 보니 제공하는 직업교육 선택의 폭이 유럽에 비해 좁고, 교육의 질도 유럽만 못하다. 하지만 어쨌든 일반고 안에 이처럼 여러 가지 선택 기회가 존재하면 보다 다양한 학생을 포용하기 유리해진다.

 

한국의 진보는 고등학교에 대해 혼란스러운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고등학교를 보편의무교육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로 지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편교육과 의무교육은 서로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서 섞어 쓰면 뜻이 이상해진다.

보편(universal)교육이란 귀족 같은 특정 집단에 교육 기회가 독점되는 것에 맞서 균등한 교육 기회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의무(compulsory)교육이란 일정한 기간 정부가 지정한 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온라인 학점취득제 활성화도 필요

 

그런데 세계 어디를 봐도 고등학교(후기중등교육)를 의무교육으로 규정하는 나라는 없다. 고등학교를 의무교육이라고 정한 나라들도 있긴 하지만(예를 들어 영국), 권고 규정만 있을 뿐 처벌 규정이 없어 엄밀한 의미의 의무교육이 아니다.

미국(4), 핀란드(3), 영국(2) 등 나라마다 고등학교 연한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닐 경우 적성과 진로에 따라 교육과정과 교과목을 선택할 권한을 준다. 참고로 고교학점제라는 말은 유럽이나 북미에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다.

의무교육 이후 단계에서 교육과정(인문계/실업계)과 교과목이 선택에 의해 분화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58일 전교조와 교사노조 등 교원단체들이 고교학점제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고교학점제가 올해 고1부터 전면 시행되면서 적잖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고, 교사들이 상당한 당혹감과 열패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교육부가 지난 몇년간 고교학점제 연구·준비학교를 지정해 운영했으면서도 출석체크 자동화 시스템같은 기초적인 지원 수단도 마련하지 않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제기한 불만 중에 몇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일단 고교학점제는 진로 선택을 조기에 하도록 강요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인문계/실업계라는 더 중요한 진로 선택을 중3 때 하도록 만든 것은 왜 비판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최소성취수준 보장제가 가진 낙인효과에 대한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1970년대까지 고등학교에 성적에 따른 낙제와 유급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출석일수만 채우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해 고교 졸업장의 위상을 추락시킨 것, 이것이 대학졸업정원제 등과 더불어 군사독재정권이 편 인기영합책이었다.

 

고교학점제와 관련해 보완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첫째,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을 의무교육과 일치시켜 중3까지로 한정해야 한다.

현재 국민공통과정이 고1까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선택과목 체계가 운영되지 못하고 고1에 통합과학(구 공통과학)과 같은 기형적인 과목이 운영되고 있다.

둘째, 선택과목을 대거 통폐합하고 주당 1시간짜리 같은 과목은 없애야 한다.

선진국 어디를 봐도 한국과 같은 다과목 피상교육을 하는 나라는 없다.

셋째, 학교 간 개설과목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문재인 정부 시절 교육부가 언급한 온라인 학점취득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넷째, 최소성취수준 보장제 같은 복잡한 제도 대신에 졸업자격시험을 도입해야 한다.

참고로 유럽은 졸업자격시험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미국은, 예를 들어, 졸업자격시험의 수학 범위가 한국의 중3 수준이다.

다섯째, 필수과목도 선택과목화해야 한다.

지금은 경계선 지능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내용과 속도로 수학을 적어도 3학기 동안 배우게 돼 있다. 이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최소한의 조치로 이명박 정부가 도입했던 수준별 이동수업을 복원하기라도 해야 한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고, 보편교육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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