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그리고 기록하면 끝! ‘오늘 하루도 참 즐거웠다’
입력 2025.05.24 12:00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오늘은 의정부에 간다. 지금부터는 의정부 도시관찰일기라고 해도 좋다.
내가 사는 서울 은평구에서 경기 북부의 의정부까지는 지하철로만 1시간40분,
버스를 갈아타고 걷는 시간까지 합치면 목적지 새말역까지 거의 2시간 반이 걸린다.
이 정도면 짧은 여행이나 다름없다.
6호선 끄트머리인 응암역에서 시작해 1호선으로 갈아타는 동묘앞역까지 50분이나 걸렸다.
한산하기로 소문난 6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자 갑자기 사람이 두 배로 많아졌다.
대신 바깥이 보여 덜 답답하다.
대학 때 살던 석계역 부근으로 가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익숙하다.
높은 건물도 생기고 지하철에 스크린도어도 들어섰지만
멀리 보이는 중랑천과 봉화산은 그대로다.
1호선을 타고 또 한참 가 회룡역에 내렸다.
여기서 의정부 경전철로 갈아타고 새말역까지 가면 된다.
회룡역에 와보는 것은 거의 10여년 만이다. 어릴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 집이 여기라 몇 번 와봤었다. 예전 회룡역은 허허벌판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시가지다. 거기가 어디였더라, 역에서 가까운 아파트였는데… 집값 많이 올랐겠는데?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경전철 승강장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뜻밖에도 그 동네의 옛날 모습이 기억난다.
장소는 나의 기억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는 것 같다.
경전철 승강장으로 갔다. ‘여기가 맞나?’ 사람들이 줄을 선 곳에 서 있으니 얼마 되지 않아 장난감 기차같이 작은 객차가 조용히 들어왔다. ‘아니, 이거 트램이잖아?’ 평범한 지하철 객차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2량밖에 안 되고, 아주 작고 좁다. 좌석도 한쪽에만 있는데 서 있는 사람과 무릎이 닿을 정도다!
경전철이 곧이어 출발하자 감탄이 나온다.
잘못해서 크게 “우왓!”할 뻔했지만 어른답게 꾹 참았다.
마치 롤러코스터 같은 가느다란 선로를 따라 빌딩 사이를 아슬아슬 지나간다.
선로 자체가 공중에 높이 떠 있어 평소 기차나 지하철에서 보는 풍경과는 완전 다르다.
새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그러고 보니 이 높이에서 도시를 이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항상 도시의 가장 낮은 바닥에서 이동한다. 지하 아니면 지면이다. 건물 7층 높이에서 움직이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수십개의 오피스텔 창문이 밖으로 지나간다.
어떤 집은 옥상에 푸른 텃밭을 만들었다.
널어놓은 빨래도 바로 옆으로 보인다.
펄럭이는 노란색 티셔츠가 눈을 잠시 사로잡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미니어처 같은 농구코트가 보인다.
탕, 탕 공을 튕기는 남자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다.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아무 관심이 없다. 매일 보는 풍경일 테니 말이다.
수상하게 보일까 봐 입꼬리를 단속하고 덤덤한 척하고 있다.
창가에 딱 붙어서 동영상을 찍고 싶지만 사람이 많아서 힘들다.
경전철 안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놀랍게도 운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경전철이 고장 나면 자동으로 멈추니 문을 열고 나와 선로를 따라 이동하라고 한다.
잠깐, 이 높이에서 걸어서 이동을? 오싹하다.
그러고 보니 운전석이 없어 앞이 트여 있는 것이었다.
회룡역에서 목적지인 새말역까지는 제법 먼데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아쉽다. 3번 정도는 더 왕복하고 싶을 정도다. 내가 내린 경전철역은 공중에 높이 떠 있었다. 마치 롤러코스터 승강장과 비슷한 느낌이다. 뚫려 있는 옆면으로 노을의 따뜻한 빛이 가득 들어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니 건너편에 식당이 몇개 보인다. 슬슬 배가 고프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형부김밥’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아니, 이모김밥, 할머니김밥, 엄마김밥은 봤어도 형부김밥이라는 작명은 생전 처음 본다.
단지 흥미롭다는 이유만으로 가게에 들어가봤다.
“어서 오세요.” 남녀 두 분이 같이 일하고 있다.
‘형부와 처제인가…’ 밥 대신 계란 지단이 들어 있는 김밥을 주문했다.
김밥을 들고 바로 앞에 있는 부용천으로 내려간다. 팔에 문신을 한 아빠와 다섯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잉어에게 뻥튀기를 던져주고 있다. 물 위로 입만 벌리고 있는 잉어 떼가 우글우글하다. “아빠, 징그러워.” 아이가 뻥튀기를 힘주어 멀리 던진다. 잉어들이 뻥튀기 한 알을 먹으려고 입을 뻐끔 벌린 채 서로 타고 넘고 난리가 났다. 지옥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비둘기도 잔뜩 몰려들었다.
“쾅!” 갑자기 킥보드와 자전거가 부딪쳤다. 비둘기를 피해서 가다 사고가 난 것이다.
두 사람 다 바닥으로 꽈당하고 넘어졌다.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다. 다행히 둘 다 다치진 않았는지 툭툭 털고 가던 길을 간다. 둘의 태연함이 대단하다. 조깅하는 사람이 훅훅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나간다.
길가에 있는 바위에 앉아 김밥 포장을 풀었다. 하나를 입에 넣고 씹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시야보다 높은 곳에 내가 내린 새말역이 보인다. 저 멀리서 경전철이 달려온다. 속도를 늦추더니 새말역으로 쏙 빨려들어간다. 1분 정도 있으니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다시 선로를 미끄러져 간다. 파란 하늘과 하천, 그 사이를 가르는 경전철 선로. 계속 바라보고 싶은 풍경이다. 잠시 의정부로 이사 오고 싶은 마음마저 생긴다.
시간이 되어 강연장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러스트레이터 이다입니다.”
오늘 의정부에는 ‘관찰일기 워크숍’을 진행하러 왔다.
나는 자연과 도시를 관찰하고 그것을 정해진 양식에 따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다.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이 코너도 관찰 일기장의 기록을 토대로 쓴다.
나에게는 관찰 일기장이 소재 수집함인 셈이다.
강연의 요지는 간단하다.
누구나 관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의정부까지 오면서 관찰한 것처럼 말이다.
종이 한 장을 꺼내 상단에 오늘 날짜와 요일, 지금 시간을 쓴다.
날씨와 관찰한 장소, 최저온도와 최고온도도 기록한다.
오늘의 달 모양을 그려도 좋다. 그 밑에 줄을 죽 그은 후에 관찰을 시작한다.
관찰은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전철 역에서도, 내 집 앞에서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도 관찰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볼 것이 있다.
뭐든지 보고 종이에 그림을 그린 다음, 옆에 설명을 같이 쓴다.
강연장 근처에는 재개발이 예정된 작은 아파트 단지가 있어 그곳을 관찰장소로 삼기로 했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둡다. 각자 관심 있는 것을 찾아본다.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하지만 의외로 금방 재밌는 것을 찾아낸다. 여러 사람이 종이를 들고 뭔가를 보며 쓰고 있으니 경비 아저씨가 깜짝 놀라 플래시를 들고 달려온다.
“여기 무슨 일 있습니까?”라며 놀란 음성으로 묻는다.
“저희 그림 수업을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니 아저씨가 “아니, 여기 뭘 그릴 게 있어!” 하며 허허 웃고 가셨다.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심지어 재개발 예정지니 부동산이나 구청에서 나온 사람 정도로 오해할 만하다.
30분 후 다시 모여 서로의 그림을 본다.
자기가 그린 관찰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설명한다.
신기하게도 다들 본 것이 다르다.
트럭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음료수병,
아파트 현관 앞에 주차된 것처럼 놓여 있는 시장 카트,
눈이 마주치자 도망간 길고양이,
분리수거장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재떨이로 쓰이고 있는 개 밥그릇,
‘여기는 화장실이 아닙니다’라고 쓰여 있는 경고문 등등.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림을 그리면 대상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리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관찰했는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다들 표정이 밝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학교 숙제로 자연관찰일기를 썼다. 물에 적신 솜 위에 콩 하나를 놔두고 거기서 싹이 트는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때 느꼈던 즐거움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관찰할 때는 나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관찰의 핵심이다.
그러나 평소의 나는 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자꾸만 예전의 잘못과 아쉬운 점을 되새긴다.
‘나는 왜 그럴까’ ‘나는 왜 그랬을까’ 모든 게 ‘나는’ ‘나는’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관찰할 때는 잠시 나를 잊어버릴 수 있다.
내가 아니라 멀리 산꼭대기에 선 송전탑을 보고, 아파트 입구에 차단봉으로 눕혀 놓은 쇠파이프를 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왜 있는지, 누가 이렇게 해놓았는지 생각한다.
관찰을 시작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내가 아닌 것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워크숍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출발한다. 아까 관찰하며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돌아간다.
경전철이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의정부의 야경을 보여준다.
‘저건 뭐지?’ 아까는 보지 못했던 또 새로운 무엇이 내 마음을 이끈다.
■이다
[이다의 도시관찰일기]뭐든 그리고 기록하면 끝! ‘오늘 하루도 참 즐거웠다’
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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