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숫자가 된 사람들 [서울 말고]

닭털주 2025. 6. 10. 20:32

숫자가 된 사람들 [서울 말고]

수정 2025-06-08 18:46 등록 2025-06-08 18:41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대표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숫자를 부여받는다.

주민등록번호, 나이, 출석 번호, 수험번호, 성적으로 매겨진 등급, 연봉, 신용평가 점수, , 몸무게, 혈압, 1번 남, 2번 여. 우리는 누적된 수치들로 식별된다.

 

또 우리는 숫자로 기입되는 데이터다. 가구 유형, 결혼 여부, 자녀 수, 수급 여부, 취업 여부, 거주 지역, 성별, 검색 기록. 심지어 우리의 감정, 우리의 마음까지도 측정 가능한 숫자로 환원되어 우리는 그래프에 점이 되거나 이상 수치로 제거된다.

 

우리는 시계와 달력이 가리키는 숫자에 매인 채 하루하루를 살고, 통장에 찍힌 숫자로 행복을 가늠한다. 가격으로만 물건의 가치를 알고, 오늘은 몇보를 걸었는지 숫자로 확인하며, 어딜 가나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일에 익숙하다.

마치 사람 손목에 바코드를 찍으면 얼마짜리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세상이다.

이 숫자들은 철저하게 위계화된 체계다.

숫자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은 시민이 될 수 없고, 어떤 숫자들은 우리를 1등 시민, 2등 시민으로 위치 짓는다. 우리의 고통마저 숫자로 치환된다.

팬데믹에 날마다 갱신되던 환자와 사망자 수처럼 우리는 단지 집계된다.

 

이미 오래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말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새 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면 어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고. “그 애 목소리는 어때?” “그가 좋아하는 놀이는 뭐지?” “그 애는 나비를 모으니?” 같은 질문 말이다.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는 고유한 존재들의 경험과 사연, 그 역사를 소거함으로써 성립된 체제다. 그럴 때만이 모든 사물, 심지어 인간의 노동과 관계까지도 동일화하여 추상적인 가치로 환원하고 양적인 등가교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환법칙은 겉보기엔 합리적이고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력의 가치와 생산물의 가치 사이에 개입된 착취를 은폐하고 불평등과 지배를 정당화한다.

 

이처럼 교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에서 인간관계는 사물화되고, 삶의 모든 영역은 합리적 계산과 효율성에 종속된다.

이런 사회에서 대다수는 고통을 견디며 살아간다.

힐링이나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취미와 여가, 자신의 감수성까지도 생산성의 척도가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마치 업무처럼 좋아요를 누르며 관계를 유지하지만, 경쟁과 생존이라는 압력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감응 능력의 상실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개인들을 조건화하는 이 사회구조의 작동 원리다. 이는 동일성의 강제가 사회적 주체화의 조건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경험 자체가 파괴되고 감각이 조건 반사로 대체된 존재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체계적으로 배제하거나 파괴한다. 불안, 분노, 수치심 등 억압된 자아의 억눌린 정동은 비난 가능한 대상을 향해 정당화된 공격성으로 터져 나온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동일화된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억압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 후보가 티브이 토론에 나와 성폭력 발언을 여과 없이 하고, 국회의원은 혐오표현 금지 법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성소수자를 삭제하는 사회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혐오는 특정 정치인의 일탈이 아니라 차이를 억압함으로써 지배 질서를 재생산하는 정치적 도구다.

 

프랑스 철학자 에스텔 페라레즈는 도움이나 보호의 요구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제도적 기대의 붕괴를 타자에 대한 감응의 취약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분석해야 할 것은, 특정 세대, 특정 성별, 특정 집단이 보여주는 현상들이 아니라 타자를 배제하고 감응을 차단함으로써 유지되는 이 세계의 구성 방식 그 자체인 게 아닐까?

인간을 숫자로 환원하고 고유성을 박탈하는 이 시스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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