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일 수 있기를
수정 2025.07.02 22:34
장동석 출판평론가
오는 토요일, 어머니와 함께 요양원에 계시는 집안 어르신 한 분을 찾아뵙기로 했다. 평생 활달했으나 아흔을 훌쩍 넘겼으니 기력은 예전만 못하실 게 분명하다. 치매나 알츠하이머는 없다지만, 기억도 그때만 못하실 것은 불문가지. 특별히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으니 공동의 기억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짧은 면회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벌써 머리가 하얗다.
그래도 피붙이니 두어 가지 이야깃거리는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토요일을 기다린다.
한 사람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는 법인데, 그렇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이가 걸어온 길의 흔적을 따라 잊었던 기억들을 되찾으며, 때론 안도했고 종종 행복했다.
절판되어 아쉬운 책 목록 중 단연 앞자리에 놓아둔,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노 가이거의 <유배 중인 나의 왕>은 알츠하이머로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아버지를 곁에서 살펴본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아버지는 열일곱 나이에 나치에 징집돼 아비규환 전쟁을 겪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꿈 많던 소년이 아니었다.
까칠함과 괴팍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으니 자식들조차 아버지의 적잖은 변화가 알츠하이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병은 아버지에게 ‘교묘히 눈에 띄지 않게’ 그물을 던졌다.
아버지는 “번번이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빼앗아가거나 훔쳐갔다”고 역정을 냈다.
집착도 심했다. 집 앞 자작나무가 잘 있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물었고, 때론 저 나무가 집을 덮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평생 살아온 집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적잖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님이 강인하고 삶이 무엇을 요구하든 의연하게 버틸 거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2015년 영화 <스틸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줄리언 무어)는 세 아이의 엄마, 사랑받는 아내, 존경받는 교수였다. 하지만 행복한 앨리스 앞에 깊은 어둠이 드리웠다.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 닥친 현실은 막막 그 자체, 조발성 알츠하이머였다. 하필 그의 전공은 언어학이었다. 말과 글이 앨리스의 전부였는데, 서서히 그 전부가 어눌해지고 기억이 희미해졌다. 어떤 철학자가 주장한 ‘내가 기억하는 나가 곧 자아’라는 말이 맞다면, 앨리스는 자아가 희미해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 철학자의 말을 거부한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지금이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현실을 애써 부정하던 남편, 발병 초반에는 갈등했지만 엄마의 변화를 누구보다 따뜻하게 품어내는 큰딸 등 가족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래야 함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원작은 알츠하이머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자이자 소설가인 리사 제노바의 동명 소설인데, ‘품절 상태’라 독자들의 손에 들릴 수 없어 안타깝다.
옛말에 마을이 한 아이를 키운다고 했다. 아이뿐이었을까.
그 옛날에도 적지 않았을 치매 노인들을 보듬은 것 역시 마을이었다.
기억을 잃었을 뿐,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바로 그이 아니던가.
과학기술이 날로 발달해 우리 후손들은 ‘실리콘 형태의 뇌’, 즉 디지털 매체로 영원히 기억을 잃지 않을 거라고 한다.
혼자서 걱정한다.
그 기억은 나, 아니 나의 자아일까.
곁을 내어주던 그 사람들이 없는데, 사라지지 않는 기억은 대체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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