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배움에는 안팎이 없다

닭털주 2026. 5. 11. 12:38

배움에는 안팎이 없다 [김탁환 칼럼]

수정 2026-05-06 06:28

 

김탁환 | 소설가

 

 

작년 가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교실에서 읽고 쓰는 수업이라면 할 뜻이 없다고 거절했다.

올해 다시 제안을 해왔기에, 섬진강과 지리산 그리고 마을을 함께 돌아다닌 뒤 글을 쓰는 방식이라면 하겠다고 답했다.

속마음을 드러내긴 했지만, 교육지원청이나 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여겼다.

나도 이미 몇 차례 따끔한 경험을 한 탓이다.

 

유치원생들의 모내기 체험을 5년 남짓 도운 적이 있다.

4살부터 7살까지 어린이들이 직접 논으로 들어가 모를 심는 프로그램이다. 모내기에 임하는 어린이들의 태도는 담당 교사의 성향에 따라 확연히 갈렸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은 뒤 논으로 먼저 들어가는 교사가 있는 반면, 이 불편한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팔짱을 낀 채 물러서는 교사도 있었다.

무엇이 불편하냐고 물었더니 학부모들로부터 민원이 쏟아진다고 했다.

옷에 논흙이 묻으면 어떻게 씻어내느냐부터

거머리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까지.

 

초등학교로부터 300m 떨어진 강연장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계획한 적도 있었다.

학생들의 교외 활동을 지원하는 버스가 그날 마침 선약이 있어 쓸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거리니까 학생들이 교문을 나와 인도를 따라 줄 맞춰 걸어오도록 학교와 상의를 하자고, 나는 행사를 같이 준비한 마을활동가에게 말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안전 책임을 따지는 민원이 들어올 일은 학교도 마을활동가도 피하려 했다.

결국 버스 이용이 가능한 날로 행사 일정을 조정했다.

 

농촌 학생들이 도시 학생들보다 자주 학교를 벗어나 생태 수업을 받으리라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학교가 어디에 있든, 학생들을 강과 들과 산으로 데려가려면, 교육지원청도 교사도 민원에 시달릴 각오를 하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뜻밖에도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답이 왔다.

열 달 동안 내가 원하는 열 군데로 학생들을 데려가도 좋다는 것이다.

삼기초등학교와 입면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스무 명의 학생과 매달 두 시간씩 함께하게 되었다. 5년 동안 곡성에 살면서 내 몸과 마음을 흔들었던 장소를 계절에 맞춰 차례대로 적어나갔다.

 

첫 수업은 신록의 계절에 어울리는 곳을 골랐다.

걸어서 출퇴근할 때 항상 지나는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나무들을 우러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우람한 나무들은 2차선 도로의 가로수로 자리를 잡았기에, 제월섬의 메타세쿼이아 숲으로 장소를 바꿨다.

 

강둑에서 버스를 내린 학생들은 계단을 내려와서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서는 것부터 신기하게 여겼다. 순창과 곡성과 구례를 지나는 섬진강엔 강줄기가 갈라지면서 섬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강 가운데 섬들은 비가 많이 와서 유량이 늘면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물에 잠겨 흙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들은 꼿꼿하게 선 채 흐르는 강물을 버텨온 셈이다.

 

백여 그루 꺽다리 나무 중에서 신중하게 한 그루씩 고르라고 했다.

눈으로 줄기 밑동부터 가지와 초록 잎을 살피고,

코로 냄새를 맡고,

귀로 나무가 내는 소리와 나무를 오르내리는 동물들 소리를 듣고,

나무에 손바닥을 대거나 줄기를 끌어안아 감촉을 파악하고,

겉껍질과 잎에 혀를 살짝 대어 맛을 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적게는 서너 그루 많게는 열 그루씩 옮겨 다니며

오감을 총동원하여 나무들과 만났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자신이 고른 나무의 이름을 마음껏 붙여보라고도 했다.

학생들은 이름을 고민하면서 다시 나무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았다. 그다음엔 사람 친구에게 오늘 이름을 붙인 나무 친구를 소개하기도 하고, 나무 친구에게 학교에서 우정을 쌓아온 사람 친구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 한 시간이 금방 흘렀다.

 

제월섬에서 만난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였던 봄, 나는 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거듭 읽었다. 두 소년의 모험이 너무도 근사해서 낙동강으로도 가고 뗏목 만들 궁리도 했다. 마크 트웨인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했고, 그때는 자연에서 만나는 낯선 분위기가 마냥 신기하고 좋았다. 바깥은 신록이었다.

 

교실로 돌아간 학생들이 제월섬에서 사귄 나무에 대해 무엇을 쓸까.

5월 말에 다시 만나야 그들의 문장을 접할 수 있다.

무엇을 쓰든지 나는 좋고도 좋다 칭찬한 뒤, 바깥의 뙤약볕에 어울리는 논으로 학생들을 데려가려 한다. 그때는 바야흐로 손 모내기의 계절일 테니까.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배움에는 안팎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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