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유리’의 변모 [말글살이]

닭털주 2024. 9. 29. 09:15

유리의 변모 [말글살이]

수정 2024-09-26 18:54등록 2024-09-26 14:30

 

 

아마, 당신도 그렇겠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마음과 자세를 보인다.

나는 그 정도가 심하여, 사람에 따라 입을 꾹 다물고 거짓 웃음을 지으며 울뚝불뚝거리는가 하면,

유치하고 쓰잘데기없는얘기들로 찧고 까불기도 한다.

나에게 이런 천사가, 악마가, 다정함이, 고집불통이 있다니.

사람뿐만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변모시킨다. 말도 그렇다.

유리라는 말을 들으면 유리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런 이미지는 분화되지 않은 채로 있다.

다른 말을 만나야 비로소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유리지갑에 쓰인 유리는 공항검색대 위에 올려놓은 여행 가방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뜻이다.

투명함’. 뻔하게 다 드러나는 월급쟁이의 지갑. ‘만원짜리 두 장, 동전 몇 알이 있군요. 번 만큼 세금을 내세요.’

 

유리천장에 쓰인 유리는 장벽.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엄벙덤벙 걷다가 부딪혀 안경을 찌그러뜨렸던 그 유리벽.

같은 천장 아래 사는 것 같지만, 여성의 머리 위엔 또 다른 천장이 하나씩 달려 있다.

너무 투명하여 그저 소문으로, 분위기로, 나중에 몰려오는 좌절감으로 알 뿐.

정부, 기업, 학교, 병원, 시민단체 할 것 없다. ‘윗대가리는 남자여야 한다.

여성은 일은 하되, 고위직까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유리천장은 뚫는 게 아니다. 와장창 부숴야 하는 거다).

 

유리 에스컬레이터란 말도 있다.

여성이 훨씬 많은 직업인데도 남성이 더 빨리 승진하는 현상을 말한다.

여성은 한 발 한 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남성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손 흔들며 위층으로 올라간다.

유리천장이 장벽이라면, ‘유리 에스컬레이터는 보이지 않는 특권.

 

이렇듯 말은 다른 낱낱의 말과 만나야 구체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