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말글살이]
수정 2025-01-30 18:44 등록 2025-01-30 14:35
독립신문 창간호
마침표를 쓰기 시작한 건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 글은 ‘쓰지만’ 마침표는 ‘찍는다’ 문장이 끝났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단호하게 찍으라 문장에 하듯이 어떤 일이든 종지부를 찍으면 끝맺음이 되고 홀가분해지겠지 이 글처럼 마침표 없는 글은 불안하다
하지만 한국어처럼 말꼬리가 발달한 언어는
마침표 없이도 ‘얼추’ 어디쯤에서 말이 끝나는지 알 수 있다
옛글에는 마침표가 아예 없었다
고소설 ‘장끼전’만 봐도 장끼가 땅바닥에 있는 콩 한 알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어화 그 콩 소담하다 하늘이 주신 복을 내 어이 마다하리 내 복이니 먹어 보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한글 전용을 하고 띄어쓰기도 하겠다고 하면서도 마침표는 쓰지 않았다
지금도 시인들은 마침표 쓰기를 꺼려한다 한번 읽어 보시라
‘30롤 화장지 세트 쌓여 있던 가게 앞 매대가 텅 비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껍질 땅콩도 일주일 지나도록 안 들여놓고 선반 여기저기 어딘가 점점 단출해지더니 가게를 내놨단다 마음 한구석이 휑해지는데 그대는 더하겠지 …… 나는 괜히 고구마 한 봉지랑 두부를 집어 들고 또 뭐 없나, 둘러보았다’
(황인숙, ‘또 사라져가네’)
마침표 없는 시를 읽다 보면,
생각과 삶이란 포개지고 이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마침표는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인위적으로 조각내고 분명하게 경계를 짓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최면을 거는 듯하다
삶에 선명한 금 확실한 끝 미련이 남지 않는 기억 오늘과 다른 내일이 정말 있으려나
마침표를 쓰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마침표 없는 글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내가 당신과 이어져 있듯이 새해가 지난해와 겹치듯이, 어정쩡하게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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