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둘도 없는 것

닭털주 2025. 3. 13. 10:08

둘도 없는 것

입력 : 2025.03.12 20:47 수정 : 2025.03.12. 20:53 양다솔 작가

 

 

서울 관악구에 있는 작은 영화관 앞에 도착했다.

영화관 앞 카페에서 감독과 제작진을 만났다. 춥고 청명한 주말 오후, 카페 안은 만원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한 영화의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 막 지방에서 올라온 차였다.

몇주간 기다리던 시간을 앞두고 조금 들떠 있었다.

이런저런 무대 경험이 있었지만, 감독과의 대화는 처음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거듭하여 보고, 질문을 적어둔 메모가 깜지를 이뤘다.

내가 말했다.

제가 좀 서툴더라도 잘 부탁드려요.”

그때 감독과 제작진 사이에 알 수 없는 눈빛 교환이 이뤄졌다.

모두가 나를 향해 수상할 만큼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내가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러니까, 오늘감독이 시선을 테이블로 떨구며 말했다.

관객이 한 분입니다.”

한 분이요?”

.”

나는 검지를 펴고 물었다.

온리 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여섯 명이 예매했는데 오늘이 되자 우수수 취소가 됐고 단 한 명만 남았다는 것이다.

작은 영화관의 사장이 말했다.

일단 아내한테 빨리 와달라고 했는데

프로듀서가 말했다.

먼 길 와주셨는데 어떡하죠.” 제작사 직원이 말했다.

날씨가 너무 추웠나 봐요.” 카페 안은 사람들의 수다 소리로 적막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어머나, 어떡해! 저는 괜찮아요.” 의외로 모두 조금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적잖이 실망할 거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상대가 영화계라면 이쪽은 출판계였다.

그쪽에서 관객이 없는 것이 별일이라면 이쪽은 관객이 있는 것이 별일이었다.

 

아예 아무도 안 오셨으면 저희끼리 놀고 헤어질 텐데 말이죠.”

내가 웃으며 말하자 진중한 인상의 감독이 한층 더 진지한 얼굴을 했다.

아뇨, 한 명도 정말 소중합니다.”

네 사람은 남은 커피를 두고 서둘러 일어섰다. 영화가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감독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감독님. 제가 영향력이 없어서요.”

감독은 웃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말했다. “제가 다음에는 100만 유튜버가 돼서

우리는 영화관의 무대 쪽 입구로 내려갔다.

그렇게 영화 <은빛 살구>GV이자, 나의 영화계 데뷔 무대의 막이 올랐다.

작은 영화관은 아늑한 아지트처럼 꾸며져 이름처럼 작당 모의하기 딱 좋아 보였다.

 

나는 첫마디에 비밀을 폭로했다.

세상 모든 관객이 한 분 한 분 유일무이하지만, 오늘은 정말 둘도 없는 관객이 오셨습니다.”

모두 빵 터지고 말았다.

관객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늘은 저와 감독님과 관객님의 삼자대면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셋 중에 두 명이 마이크를 들고 있었지만, 이야기는 공평하게 나눠서 했다.

 

아파트를 둘러싼 핏빛 가족 블록버스터, 영화 <은빛 살구>!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 영화를 두고 내가 말했다.

주인공이 돈을 받으러 갈 가족이 있다는 게 너무 부럽더라고요.”

유일한 관객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파트라는 걸 꿈꿔본 적조차 없어요.”

감독이 물었다.

아파트만큼이나 소중한 게 있다면 뭘까요?”

돌아가며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고백했다.

관객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사는 것이요.”

 

나는 그 무대 위에서 생각했다.

나에게 그것은 유일하고 무이한 관객인 것 같다고.

이 무대가 꼭 세상의 축소판 같다고.

이 무대를 성립시킨 것은 영화도 아니고, 감독도 아니고, 제작진도 아니었다.

멀리서 달려온 나도 아니었다.

단 한 명의 관객이었을 뿐이다.

감독이 말했다.

지금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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