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는 말에 담긴 함께 사는 세상
입력 : 2024.12.26 21:24 수정 : 2024.12.26. 21:26 레나 사진작가
한국수어
한국수어로 ‘고맙다’를 표현하고 있다. ⓒ레나
20대 후반 업무로 알게 된 분이 있었다. 물어볼 것이 있어 e메일을 드렸는데, 아주 상세하게 답변을 보내주셨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발신자의 이름과 ‘고맙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느낀 감정은 낯섦이었다. 분명히 감사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감사하다는 인사로 끝을 맺다니.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번 더 메일을 주고받으니 나도 뭔가 그분이 감사해야 할 일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도 요청받은 일들을 메일로 처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끝에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를 붙인다.
요즘은 감사하다는 말에 대한 호응으로 ‘아니에요’를 많이 쓰지만, ‘별말씀을요’나 ‘천만에요’ 같은 격식 있는 표현도 있다.
어원을 들여다보면 감사하다는 말에 ‘결코 그렇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응답하는 셈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말은 우리의 다른 행동들로부터 의미를 얻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사용자의 문화와 행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말이다.
감사하다는 말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답변하는 기저에는
서로 돕고 사는 게 당연하다는 공동체 의식이 숨어 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가장 먼저 시켰던 교육도 감사를 표하는 일이었다.
외할머니는 관대한 편이었지만, 인사하는 것과 무언가를 받거나 도움을 받았을 때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것에 무척 엄격했다.
어릴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어른이 시키니 했는데,
이런 행동들이 상대를 존중하고 타인의 호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이를 먹고 나서야 깨달았다.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면 고마워할 일들이 많다.
아침 식탁에 오른 쌀과 두부는 농부의 수고 덕분이다.
통근 버스나 지하철은 운전기사의 수고로 목적지로 이동한다.
운전하는 도로에 누군가가 그어놓은 선들이 사고를 막는다.
일상의 매 순간이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할 일들이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고마움이 하나둘씩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다 문득, 고맙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공용어인 한국수어(手語)를 사용해도 좋을 일이다.
손등을 다른 손의 날로 가볍게 두드리면 고맙다는 뜻이 된다.
주변을 돌아보고 감사를 표하며
새로운 해를 반갑게 맞이하는 따뜻한 연말이 되기를 소망한다.
'칼럼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 것도 없는 풍경의 아름다움 (2) | 2024.12.28 |
---|---|
진정 ‘스포츠계 리더’는 없는가 (0) | 2024.12.28 |
기계가 쓴 글과 사람이 쓴 글 어떻게 다른지, 저는 압니다 (5) | 2024.12.26 |
여대·지방대의 가치는 선택한 학생들이 안다 [왜냐면] (1) | 2024.12.26 |
밥심과 갈무리 (4) | 2024.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