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새해 다이어리를 샀습니다, 천 원짜리입니다

닭털주 2024. 12. 30. 10:26

새해 다이어리를 샀습니다, 천 원짜리입니다

 

꼭 비싼 다이어리여야만 할까... 나를 지탱하는 4개 주제를 떠올렸다

24.12.27 15:41l최종 업데이트 24.12.27 15:54l 최은영(christey)

 

 

연말마다 다이어리 광고가 흔해진다. 모 커피 프랜차이즈의 다이어리를 얻기 위해 그 카페 음료만 열심히 먹기도 한다. 새해 다이어리를 받기 위한 '프리퀀시'를 당근에서 거래하거나 단톡방 품앗이로 채우는 일도 주변에서 자주 본다.

 

만 원짜리든, 오만 원짜리든, 카페 굿즈든, 다이어리를 사고 얻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같다.

'내년부터는 다이어리를 진짜 잘 써봐야지.' 이 마음이다.

잘 쓰려면 구성도 좋아야 하고 디자인도 내 마음에 쏙 들어야 한다. 저절로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지탱하는 4개의 기둥

 

새해 즈음을 떠올려보자. 그때 심사숙고 해서 고른 다이어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로 대답할 수 있다면,

아울러 바로 어제까지도 다이어리를 썼다면 이 글은 더 읽지 않아도 된다.

혹시 수학의 정석 집합 부분만 새까맣던 학창 시절이 내 다이어리와 겹쳐진다면 이 글에서 해결책을 찾길 바란다.

 

한편 다이어리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이어리 쓰기로 특별한 성과를 만들어내서 책도 쓰고 강의를 나가기도 한다.

모두 유튜브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을 보고 갑자기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솟구쳐서

몇 만 원짜리 다이어리를 사는 게 내 연말의 거의 루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실은 사놓고 안 쓰는 것까지가 루틴이었다.

이번 해는 쓸 거 같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내가 나에게 꾸준히 속은 셈이다.

올해 또 속으면 내가 너무 싫어질 거 같았다.

올해도 다이어리 책을 읽었고, 영상을 봤지만 '마침내' 다이어리를 사진 않았다.

 

대신 천 원짜리 다이소 수첩을 샀다. 4개로 분류할 수 있는 인덱스가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운동, 관계, 공부, 살림'이라고 썼다. 나를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이다.

 

아마 작년 같았으면 공부를 제일 먼저 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공부도 내가 단단해야 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운동이 1번이다.

 

몇만원 짜리 다이어리 대신 선택한 다이소 천 원짜리 수첩 최은영관련사진보기

 

몸만 단단해서 될 일은 아니다. 마음도 단단해야 한다. 그러려면 관계가 망가지면 안 된다. 혼자 노는 나 같은 아줌마는 관계라 봐야 가족이 전부다. 가족은 너무 가까워서 소홀해지기 쉽다. 소홀하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 막말이 나오기도 한다.

 

이 수첩에 가족에게 할 예쁜 말들을 적어본다. 나는 다짐만 해서는 안 하는 인간인 게 확실하더라. 텍스트로 박제하면 틀림없이 그 말을 한다. "사랑해, 너는 잘 될 거야, 엄마 자식으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이런 말들이 단지 '쓰기'만 했는데도 술술 나온다. 그렇게 아이들을 등교시키면 이 추운 겨울이 폭신하게 시작하는 기분이다.

 

그 전까지의 공부는 공포심에서 시작된 공부였다. 공부해서 뭘 하겠다는 의지보다 '나만 뒤처질까 봐' 불안해서 하는 강박의 일종이었다. 공포와 강박이 밀어붙이는 공부는 오래 못 간다. 내가 재밌고 내가 궁금해야 한다. 그런 소재로 공부 칸을 채운다. 남들이 보기에 쓸데없어 보일 수 있어도 내 흥을 담보로 하니 그야말로 소확행이다.

 

25년 키워드 중 하나가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라고 하더라.

운동하고, 가족에게 예쁜 말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탐색하는 이 하루야 말로 가장 훌륭한 아보하다.

 

이 수첩은 작아서 몇 줄만 써도 금방 한 페이지를 쓴다. 덕분에 다이어리보다 훨씬 잘 쓸 거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항목별로 한두 줄 써놓고 지울 때 성취감도 있다. 나를 구성하는 네 가지 기둥이 직관적으로 보이니 기준도 명확해진다. 어디 내보일 다이어리는 분명 될 수 없겠지만 기준과 성취감, 그 두 가지로는 어떤 다이어리도 이길 자신이 생긴다.

 

결국 다이어리는 도구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적힌 마음이다.

비싸고 멋진 다이어리가 아니어도 괜찮다. 천 원짜리 수첩도 충분히 소중하다.

내가 적는 말들이 나를 다잡아주고, 내가 쓰는 다짐들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채워가다 보면 나도 '다이어리 쓰기 성공'한 오프라인의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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