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어주다 [말글살이]
수정 2025-09-11 18:54 등록 2025-09-11 17:30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명지다방 아저씨는 가게 일은 아내에게 내맡겨놓고 접시 위에 오른 해삼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담배만 뻐끔거렸다. 낙이라곤 동네 꼬맹이들을 불러 바둑판을 벌이는 것. “스무 점 깔고 두 집만 내면 네가 이긴 걸로 하자”며 꼬신다. 그깟 두 집쯤이야 하며 덤벼들지만 원형탈모처럼 내 돌만 한 움큼씩 들려 나가는 걸 보노라면 약이 오른다.
실력이 처지는 사람이 미리 돌을 몇 점 깔고 시작하는 ‘접바둑’은 인간 문명이 서로의 격차를 인정하며 공생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는 걸 보여주는 흔적이다. 약한 자를 찍어 누르고 잡아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약한 자의 위치로 내려가기. 강자가 불리한 조건으로 내려가니 수준과 힘의 차이가 상쇄된다. 예컨대, 어린 아들과 50미터 달리기를 하면서 아이를 25미터 앞에 서게 한다.(이러면 나도 ‘쎄빠지게’ 달려야 한다.) 상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상대의 잘못을 묵인 방조하는 ‘봐주기’와는 다르다. ‘나보다 실력이 떨어져? 그럼 내가 한 수 접어줄 테니 같이 놀자!’(능력 있는 사람이 지배하고 독점하는 세상에서 이 얼마나 반자본적인 방식이람!)
사람들은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는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건강한 가정을 생각해보라.
가정은 ‘접어주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돈을 벌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쓰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아이의 무능력을 접어준다.
아이는 돈을 벌어오지 않지만 기죽지 않고 밥을 먹는다.
용돈을 달라고 한다. 우리 사회도 접어주기의 원리로 작동하면 안 되는가.
무능한 남편을 접어준 아내 덕분에 명지다방 아저씨는 나를 접어줄 수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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