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향민 [말글살이]
수정 2025-09-19 07:15 등록 2025-09-18 17:49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말의 본질은 경계 짓기다. 피할 수 없다. 생각의 본질도 경계 짓기다. 피할 수 없다.
‘예쁜 사람’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예쁘지 않은 사람’이 누군지 경계를 만들어야 한다.
‘상대의 좋은 면만 보겠다’고 다짐할 때, 상대의 ‘나쁜 면’이 뭔지 알아야 한다.
‘건강하다’라는 말 속에는 건강하지 않은 상태,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몸에 대한 경계 짓기를 실행해야 한다.
이미 있는 말의 본질이 이러하니, 나는 작위(作爲)에 의한 명명에 시큰둥한 편이다.
차별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언어적 실천이 아닌 명명에 시큰둥하다.
당사자의 간절한 요구가 아닌, ‘호의에서 출발한’ 시혜적 명명에 더 시큰둥하다.
20년 전 ‘탈북자’를 ‘새터민’으로 바꾸려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 통일부 장관의 야심 찬 재도전인가?
‘탈북민’이란 말이 주는 어감이 안 좋다면서, ‘이북에 고향을 두고 오신 분들’이란 뜻의 ‘북향민’을 밀고 있나 보다.
정부의 용어 변경 과정은 규칙적이다.
관련 학회나 연구자에게 몇달짜리 용역을 주어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몇개의 후보 명칭을 골라 설문 조사를 돌린다.
1위 후보를 뽑는다.
국립국어원의 자문과 동의를 득한다.
대대적 홍보, 법령 개정, 모든 공문서에 적용. 달리는 기차를 세울 수 없다.
이 말을 바꾸고 싶은 건 ‘탈북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었을 텐데, 그게 말의 문제인가?
정말 ‘탈’이라는 발음이 별로라서 그런가?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는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북녘에서 온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세상도 바꾸고, 말도 바꾸면 되지 않겠냐고?
현실을 바꾸지 않은 채 말만 너무 아름답게 하면, 그걸 ‘호도’라고 한다.
감추거나 덮어 버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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