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물 탄 듯 [말글살이]
수정 2025-09-25 18:41 등록 2025-09-25 17:14

클립아트코리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30년 전 어느 더운 초여름 날, 식장을 빌릴 형편이 안 되어 학교 안 선동호라는 아담한 호수 앞 공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시민 참여형(?) 결혼식을 해보겠다며 지인들 몇몇에게 축하의 말을 부탁했다.
후배 한명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포고문 발표하듯 글을 읽어 내려갔다.
다른 말은 기억나지 않는데, 이 말만은 뼈에 사무친다.
“형은 우유부단하다!”
얼마나 뜨뜻미지근하게 살았으면 결혼식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을꼬.
우유부단한 짓을 할 때마다 ‘그때 그 말이 틀린 얘기는 아니군’ 하며 그 선고를 떠올린다.
나의 생은 유예하는 삶. 결행보다는 유보를 택한다.
나설까 물러설까, 멈출까 말까, 말할까 말까를 미루고 미룬다.
뚜렷한 주관이 없으니 말하려는 바가 또렷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기 일쑤. 이 얘기를 들으면 이 얘기가 맞고 저 얘기를 들으면 저 얘기도 맞다. 팔랑귀다.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다’며 타박을 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부정적인 말뜻 뒤에 있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다.
나는 ‘물에 물, 술에 술’을 탄 듯한 사람을 좋게 본다(부럽기까지 하다).
타인에겐 ‘맺고 끊는 게 없고’ ‘물러 터지고’ ‘티미해’(트미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한 것이겠지. 자기 맛을 잃고 백이면 백, 싱거워진다.
갈증을 해소하지도, 취흥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이도 저도 아니게 머릿속이 늘 혼탁한 걸 보면 나는 아무래도 물에 술 탄 듯한 쪽.
바라건대 우유부단함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면, 적어도 물에 물 탄 듯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닌가? 술에 술 탄 듯한 사람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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