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삶이 떠나는 순간을 배웅하며 [6411의 목소리]
서울시립승화원에 위치한 공영장례 ‘그리다’ 빈소 측면. 빈소 소개와 함께 근조기가 놓여 있다. 필자 제공
이수연(필명) | 공영장례 활동가
승화원의 사계절은 유달리 뚜렷하다. 어떻게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냐는 물음에 “이곳은 사계절이 뚜렷하게 느껴지거든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날도 승화원의 풍경은 완연한 봄이었다. 연한 잎이 고개를 들고 꽃이 피어오르는 날. 그리고 어김없이 공영장례가 시작됐다.
장례 현장에 나가다 보면 보통 위패에 적힌 성함, 출생 연도, 마지막 주소지만 보게 된다.
그나마 사진을 구할 수 있으면 영정이 올라가고, 사별자(고인의 주변 지인과 유가족)에게 연락이 닿아 참석 의사를 표하면 고인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다.
‘그날’은 미리 전달받은 내용상 사별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오전 장례 예식을 마칠 무렵, 한 고인의 형님이 빈소를 찾아왔다.
“어떻게 오셨을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사별자는 고인의 성함을 말하며 자신이 형이라고 했다. 고인에게 식사를 올리는 마지막 예식은 이미 끝났지만, 고인의 형님을 안으로 안내해 헌주와 헌화를 도왔다. 지긋한 나이에 무릎이 불편한 사별자는 조용히 묵념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조금이나마 고인의 삶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고집스럽지만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어디 하나 특이하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한 편이었고, 결혼을 해서 자녀도 두었다.
20년 전 자식의 결혼식에서 찍은 사진은 그날 고인의 영정사진이 되어 있었다.
형님은 이후 동생에게 힘든 일이 쏟아졌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서 고단했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식이 그래, 속을 썩이면 끝도 없거든.”
그 말 뒤에 다시 긴 정적이 흘렀다.
“힘든 모습 보이기 싫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20년간 연락도 끊고 그렇게 사라졌지. 그래도 어디서 살아 있을 거라 생각했어. 운전하다 공사판을 보면 혹시나 동생이 거기 있나 싶어서 차를 멈춰 세우고 한참이나 봤다니까.”
형은 20년간 연락이 끊긴 동생의 안부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놀라셨겠어요. 20년 만에 소식이, 그래서요.”
위로를 건네자 사별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놀랐지, 놀랐어요”라고 연신 말했다.
그의 눈은 오래된 영정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떻게든 살아 있을 거라 믿어온 마음도 그날로 마침표를 찍었을 터였다. 고인의 화장을 마치고 분골한 뒤 함에 담아 안을 때도 그는 말이 없었다.
산골을 하기 위해 유택동산으로 이동하는 길, 사별자가 물어왔다.
“그래서, 마지막에 어떻게 갔는지 알아요?”
조심스럽게 묻는 그의 말투에서 처음부터 묻고 싶었다는 걸 느꼈다. 알려드리고 싶어도 우리 역시 고인의 사인은 전달받지 못했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그는 혼잣말처럼 “그래”라고 말한 뒤 더는 묻지 않았다.
공영장례 봉사활동을 한 지도 햇수로 4년이다.
사산아도,
젊은 고인도,
외국인도,
100살이 넘으신 어르신도 있었다.
사별자가 계시지 않은 날이 더 많아 봉사자들이 상주를 맡고, 봉사자도 몇 없을 땐 손이 부족해 뛰어다니기도 했다.
손 하나가 귀한 건 어느 장례식이든 마찬가지이듯, 공영장례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고인을 잘 알지 못한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어느 때가 가장 괴로웠고 또 기뻤는지 알 길이 없다.
전달되는 것은 고인의 단편적인 정보뿐인지라, 행여 영정 사진이라도 있는 날엔 빤히 고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마침내 그날처럼 고인의 삶을 엿들을 수 있게 될 때면 새삼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장례 현장에서 마주하는 고인들의 죽음은 결코 특별하거나 유별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모두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을 부대끼며 살아간, 어쩌면 길에서 옷깃을 스쳤을지도 모를 한 사람이라고.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듣지 못했다고 해서 고인 한분 한분이 살아온 삶의 무게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변하지 않고 현재를 지탱한다.
애도 과정에서 말하는 ‘수용’이 ‘상실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듯,
우리 역시 그들의 삶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고 해서 고인의 생을 없던 일로 치부할 수 없다.
비록 ‘나’는 알지 못하는 삶이었을지라도
그들의 고단하고도 치열했던 삶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그리고 한 생명으로서의 마지막을 우리가 배웅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보통의 삶들이 이 세상에 분명히 살아 있었음에 마지막 증인이 된다.
※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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