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가 싫다

닭털주 2026. 5. 4. 19:04

개천에서 나는 사회가 싫다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

 

 

만약 당신의 삶에서 딱 하나만 바꿀 수 있는 마법의 카드가 생긴다면 무엇을 바꾸겠는가?

학벌, 직장, 아파트.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잔인할 만큼 현실적인 답은 하나다.

부모를 바꾸는 것.

이 비극적인 상상은 노력이라는 신화가 파산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잘 알고 있다. 부모를 어떻게 바꿀 수 있겠나.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한국 사회에서 명문대 진학을 가능하게 하고,

그 간판이 좋은 일자리와 안정된 삶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는 명언을 신조처럼 각인하고 있다. 99%의 노력에 비해 1%의 영감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 명언의 진짜 의미는 천재가 되기 위한 99%의 노력을 다 채웠다고 해도, 결국 1%의 영감이 없다면 천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1%처럼, 삶의 결정적 조건 중 일부는 내가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사회가 그렇다. 청년들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개천에서 운 좋게 명문대에 진학한다고 해도,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서울에서 제대로 된 집 한칸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2024년 한국은행은 서울과 비서울 지역의 서울대 진학률 격차 가운데 학생의 잠재력 차이로 설명되는 몫은 8%에 불과하고, 92%는 거주 지역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지역별 학령인구의 비율에 따라 대학 신입생을 선발하자는 제안을 했다.

비서울 지역에서도 이 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도 결은 다르지만, 한국은행의 제안과 그 의도는 유사해 보인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한탄이 쏟아지는 현실에서,

이런 대안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불평등한 출발선을 교정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지역비례로 명문대에 진학하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격차가 해소되고, 불평등이 완화될 수 있을까?

개천에서 용만 나오면,

노동시장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늘고,

임금 격차도 줄어들며,

중소기업, 비정규직도 괜찮은 일자리가 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 구조와 구멍이 숭숭 뚫린 복지국가를 그대로 둔 채, 운 좋게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사회가 만들어져도, 노동시장에서 좋은 일자리가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역비례 입학제도는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일부 줄일 수도 있지만, 좋은 일자리의 총량을 늘리지는 못한다. 개천에서 천상에 오른 극소수와 개천에 남겨진 절대다수의 격차는 변하지 않는다. 경쟁이 완화되는 것도 아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길이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열렸으니,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용이 되지 못하는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불성실함과 게으름의 결과가 된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았으니, 평생을 개천에서 살아야 하는 삶마저 공정한 결과로 포장된다. 차별과 불평등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보다 더 쉽게 정당화될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 어떤 소수는 이미 여의주를 품고 태어나고,

개천은 살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사회는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기다리는 사회가 아니다.

누구도 용이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끝없는 경쟁에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좋은 사회란 용이 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

특권을 보장받는 용이 필요 없는 사회,

아예 개천이 없는 사회다.

 

직시하자. 1990년대 이후로 성장만으론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개천 없는 사회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를 늘리자는 것이 아니다. 복지를 늘리면 소비가 늘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익숙한 주장을 반복하려는 것도 아니다. 복지가 성장을 추동하고, 성장이 복지를 확대하는, 성장과 복지를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통합해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현실적인 개혁과 담대한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분이 저를 두고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씀하지만, 이 성공 스토리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모범이 돼선 안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2년 대선 후보 시절 했던 말이다.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자. ‘개천없는 사회를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