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어느 선생님에 관한 기억

닭털주 2026. 5. 26. 12:31

어느 선생님에 관한 기억

 

수정 2026.05.25 20:12

 

최유안 소설가

 

 

5월이 되면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장소는 고등학교 교실, 젊은 여자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 있다.

수업 시간이었고, 교복을 입은 나는 민주주의에 관해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과서에 있던 딱 한 줄을 남기고 있었다.

짧고 건조하게 5·18을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선생님은 비장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날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너희가 기억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선생님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그 울음이 갑작스럽고 기이하게 느껴졌다.

쉬는 시간 옆 반 친구와 선생님의 울음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그녀가 옆 반에서도 그 문장을 읊다가 울었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반에서도, 또 다른 반에서도. 그녀의 가족이 도청 앞에서 희생당했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나는 그녀의 울음에 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의 사연을 알게 된 날 부모님께 19805월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부모님은 당황하는 눈치였고, 어째서 그런 걸 묻는지 되물었다.

물어서 좋을 게 없으니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엄숙했다.

몇년 후 유학 중에 만난 독일인 친구가 광주에 관한 글을 읽었다며 말을 걸어왔다.

그 도시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려달라는 물음에 나는 해줄 말도, 아는 것도 없었다.

내가 자란 동네는 걸어서 20분이면 금남로에 닿을 거리임에도 말이다.

 

나는 가족들에게 다시 물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막내 고모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친구가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다른 고모는 광주로 돌아오자마자 어린 남동생을 옥상 장독에 숨겼다.

젊은 남자들은 죄다 잡아간다는 풍문 때문이었다. 고모가 타고 온 버스를 끝으로 광주는 봉쇄되었다.

 

동생을 숨겨둔 채, 날이 밝자마자 고모는 어른들 몰래 금남로로 나갔다.

끔찍하고 무서웠어도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속에서 천불이 났다고 했다.

내가 그들에게 들은 말은 이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들에게 그날들은 눈앞에 있던 사람들이 죽고 다친 날일 뿐이었다.

그들이 지켜낸 것은 민주주의 같은 거대한 단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그해 오월에 관해 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기억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광주의 오월은 15년이 지나서야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신군부와 관변 언론은 소요 사태나 폭동으로 몰아갔다.

물론 1988년에도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있었지만, 특별법 제정까지는 7년이 더 걸렸다.

교과서에 5·18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라고 한다.

적어도 10년 동안은 누군가 진실을 지우려 했고, 그 영향은 버젓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흐름은 우리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계속 있었다.

레바논 내전 이후의 사면법,

스페인의 망각 협정,

작은 섬나라 피지에서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법을 바꿨다.

과오를 지우고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 국민에게 역사를 잊으라고 강요했다.

그러니 끊임없이 제대로 된 것을 가르쳐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선생님들의 용기에,

나는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그 선생님을 또렷이 기억한다.

젊고 여리여리했던 사회 선생님,

민주주의에 관해 말할 때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참던 모습.

그 모습이 평생 남을 장면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의 내게 그 모습 자체로 교육이었다.

두렵지 않았을 리 없었음에도 사명으로 이 땅의 다음 세대를 길러낸 선생님들,

그들이 있어서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의 숨과 말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듯,

이 나라의 미래도 지금의 우리에 의해,

다음 세대가 받을 교육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