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모두를 위한 추앙
수정 2026.05.26. 20:07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성인지미(成人之美)”라는
공자의 말을 주희는 “이끌고 장려함으로써 선한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정약용은 선악의 측면이 아니라 미명의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면서,
“찬양하여 훌륭한 이름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장점을 높이 인정해줌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다.
‘자신의 존재 가치’라는 것, 누군가에게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한다.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었나 보다. 다 죽어가는 나 살려 놓은 게 너야.”
“난… 아저씨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데.”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과 이지안이 나눈 대화다.
“거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암담한 현실에서 이들을 살게 한 건 서로를 향한 인정과 응원이었다.
같은 작가의 후속작으로 유명해진 낯선 단어, ‘추앙’도 같은 맥락이다.
염미정이 구씨에게 말한다.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구제 불능 황동만을 구원한 것 역시, 변은아의 이런 말이었다.
“평생 당신을 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대단한 뭘 만들지 않아도, 지금처럼 평생 코미디로, 모든 걸 코미디로 씹어먹는 당신을 보면서.”
주인공의 과잉된 언행에도 불구하고 전작들보다 힘 빼고 볼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 뭘까 생각해보니, ‘싸움’이었다.
힘겹게 버텨내는 인물이 아니라, 말과 몸으로 바닥까지 드러내며 싸움으로써 존재를 드러내고 판을 바꾸려는 인물들 덕분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공지능(AI)이 날씨마저 만들어주는 세상,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오히려 존재는 저마다의 가치를 잃고 말 것이다.
힘겹게 싸우고 있는 모든 이의 존재 가치가
바로 그 통제될 수 없기에 지니는 생명력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서 싸우기는 너무 버겁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채워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서로를 향한 추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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