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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뚜벅뚜벅, 청소년 자치 학교 [세상읽기]

닭털주 2025. 2. 13. 10:43

고난의 행군뚜벅뚜벅, 청소년 자치 학교 [세상읽기]

수정 2025-02-12 19:13 등록 2025-02-12 18:49

 

 

클립아트코리아

 

 

이병곤 | 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현실에서 이런 학교가 가능할지 마음속으로 그려보자.

초등 5학년에서 고교 3학년 사이 아이들이 함께 배운다. 이들 대부분은 각자 다른 공교육 학교에 재학 중이다.

학생이 배움을 주도하고 길잡이 교사는 협력한다.

활동 시간대는 방과후, 주말, 방학 때다. 전체 참여 규모는 300명 안팎이다.

 

신기하게도 가능하다.

()이 이뤄지는() ‘몽실학교’. 2014,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싹이 텄다.

의정부여중 김현주 선생의 헌신적 실천에서 비롯됐고, 여러 마을교육 실행가들이 협업하면서 지속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 자치 배움터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은 학년 구분 없이 관심 분야별로 모여 연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부화기를 만들어 메추리를 기르는 병아리 말고 메추리’,

공정 여행을 통해 지역 내 역사 기행을 진행하는 길을 따라서같은 학습모임을 만들어 활동한다.

2017년에는 이런 유형의 마을 프로젝트 18개가 구성됐다.

학생들 모임은 단순 동아리와 다르다.

공공성을 추구한다.

몽실학교의 지향점을 잘 드러내는 강령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자이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2015년 이맘때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던 날, 경기도교육청 옛 북부청사의 침침한 조명 아래 둥그렇게 모여 앉아 회의하던 학생들의 실루엣을. 당시 그곳은 교육청 사무집기를 새 청사로 모두 이전한 직후여서 콘크리트 바닥과 벽, 천장과 기둥, 그리고 깜박거리는 형광등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역설이긴 하나 그 을씨년스럽던 빈 공간이 자치활동 하기엔 제격이었다.

공간을 누가 어떻게 사용할지, 실내 장식은 무엇으로 할지 결정하면서 자치 능력을 발휘했다.

정해진 것이 없어야 아이들은 방향을 가늠하고, 길을 발견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길 위에서 더듬거리며 방법을 찾다 보면 이윽고 사람을 만난다.

결국 공간--사람이라는 순서로 자연스레 배움의 가닥을 잡아가는 도중에 새로운 의미를 깨친다.

 

몽실학교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전국에서 해마다 2천명에 이르는 방문객이 다녀갔다.

청소년 자치 배움터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다져진 것이다.

2022년까지 경기도내 7곳에 몽실학교가 설립됐고,

서울의 다가치학교 2,

인천 은하수학교,

전북의 자몽(自夢),

강원 날다학교 등

전국 24곳에 자치 배움터가 생겨났다.

 

이토록 소중한 교육 실천은 2022년 지방선거 이후 고난의 행군을 견디고 있다.

보수 후보가 대거 선출된 시··구와 시·도교육청, 기초자치단체 의회에서 공동체’ ‘자치’ ‘마을과 같은 이름이 들어간 정책 분야 예산을 큰 폭으로 삭감하거나 전부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열린 관련 분야 워크숍 두곳에서 현장 전문가들이 전하는 눈물의 호소를 나는 묵묵히 듣고 있어야 했다.

 

무너진 건물의 복원은 차라리 쉽다.

반면 마을’ ‘공동체’ ‘교육분야는 공들여 빚어내야 그 가치가 산다.

오랜 세월을 거쳐야 깊은 색과 멋을 드러내는 도자기처럼 그것은 한번 깨지면 복원이 어렵다.

의욕과 사명감에 가득 찬 마을교육 활동가 한 사람을 지역에서 만나는 일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예산을 확보했을 때는 그런 인재들을 날름 데려다 쓰고,

돈 떨어지면 알아서 하라고 내치면 자치 배움터는 어떻게 운영될까.

 

교육에서 자치를 강조하는 까닭은 그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하기에 그런 것만이 아니다.

배움의 성패는 배우려는 이의 욕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학생이 선택하고, 책임지며, 의미까지 덧붙여지는 학습이라면 누가 마다할 것인가.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 배움의 지속성이 담보된다.

배움 욕구의 생성과 지속.

이것이 교육학에서 가장 난제로 꼽힌다.

자치를 통한 교육은 그런 어려움을 부드럽게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해결사이기도 하다.

미래를 지향하는 교육 방향도 학습자의 주도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나는 바라보고 말았다.

배움 의지와 인정 욕구가 한껏 솟아오른 학생들의 눈빛과 자세를,

그들이 보여주는 빛나는 성장을,

그 곁을 지키는 교사와 활동가들의 벅찬 자부심을.

총점, 석차, 경쟁, ‘생기부따위의 공부 압력으로는 그같이 늠름한 자세를 빚어내지 못한다.

아름다운 학습자들의 눈빛을 바라보았던 죄로 나는 청소년 자치 학교의 지속적인 성장을 아직 포기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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