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갑다 [말글살이]
수정 2026-02-19 18:27 등록 2026-02-19 17:11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나는 살갑지 않다. 살갑기는커녕 차갑고 날카롭기가 얼음장 같다.
쓸데없는 흰소리나 늘어놓을 줄 알지, 상대를 보듬을 줄은 모른다.
주변 사람에게 곰살맞게 대하는 사람을 보면
어디서 저런 정성과 다정함이 나오는지 의아하다.
부드럽고 상냥하다는 뜻의 ‘살갑다’는 본래 ‘공간’을 나타내던 말이었다.
집이나 그릇이 겉보기보다 속이 넓을 때 쓰던 말이다.
공간을 뜻하던 말이 사람의 품성으로 건너왔다.
사근사근한 사람을 ‘살갑기는 평양 나막신’이라 했다.
평양 나막신이 겉보기엔 볼이 좁고 투박해도 막상 신으면 발이 쏙 들어갈 만큼 속이 넉넉하고 편해서 생긴 속담이다.
살갑게 구는 건 뭔가를 얻으려는 욕심에 살랑거리며 알랑방귀를 뀌는 것과는 다르다.
‘마음의 평수’ 문제다.
속마음에 남이 들어와 쉴 자리가 있는 사람이다.
내 속에 타인이 들어설 여지가 있는가.
나의 공터에 타인을 초대하는 마음이 있는가.
내 안이 나로 꽉 차 있으면 타인이 들어설 틈이 없다.
빈방처럼 마음에 여백이 있어야 살가움도 나온다.
‘살가움’은 개인이 혼자 닦는 마음 수양의 결과가 아니다. 그 여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시간에 쫓기고 경쟁에 내몰린 사람에게 ‘마음을 넉넉하게 가지시라’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시라’고 하는 건 강압이다.
타인을 환대할 공간은 내 삶이 비루하지 않을 때 생긴다.
우리는 살갑지 ‘않은’ 게 아니라 살가울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비좁은 세상이 우리를 옹색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토록 차가운 건 내면의 불꽃이 꺼져서가 아니다.
남을 들일 빈방이 없어서다.
살가움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다.
공용 공간을 늘려나가듯, 우리 사회가 부추겨주어야 할 사회적 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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