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진짜 주어

닭털주 2026. 2. 22. 15:40

진짜 주어 [말글살이]

 

수정 2026-02-13 06:16등록 2026-02-12 19:11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빼앗는다.”

 

우리는 이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분명해 보인다.

문장의 주어 자리에 앉은 인공지능은 어느새 결단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된다.

빼앗긴 자의 분노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한다.

도구에 불과한 기술이 욕망을 지닌 행위자로 바뀐다.

 

이 방식은 새롭지 않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알약을 삼켰다라는 문장을 살짝 바꾸어 어둠이 도시를 삼켰다’ ‘태풍이 마을을 덮쳤다같은 문장을 만들었다 치자. 어둠은 입이 없고 태풍은 의도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이 삼키고 덮친다고 말한다. 인간이 서야 할 자리에 비인간을 세워두기만 하면 세계는 금세 인간처럼 움직인다. 말은 의인화를 하기에 손쉬운 틀을 갖고 있다. 주어만 바꾸면 사물과 자연, 심지어 추상적 개념까지도 행위자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를 인간의 언어 틀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해하기 쉬워지는 대신, 복잡한 현실은 잘려나가고 가려진다.

 

의인화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오래된 습관이다.

낯선 현상을 인간의 얼굴로 바꾸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습관은 책임의 자리를 흐리기도 한다.

주어는 누가 했는지를 밝히는 자리이자 책임자가 앉는 자리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말이 반복될수록, 인공지능은 도구가 아니라 행위자가 된다.

비용 절감과 해고를 결정한 사람은 문장 밖으로 밀려난다.

기술은 판단을 돕지만 선택을 대신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줄이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문장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세계를 배치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쓰는 말이 책임의 방향을 정한다.

말이 책임을 가릴 때, 비판의 화살도 엉뚱한 곳을 향한다.

일자리를 빼앗는다의 진짜 주어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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