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영어 [말글살이]
수정 2026-06-04 17:18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대학에는 영어로 쓴 논문이 한국어 논문보다 학문적으로 더 우수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과장이나 거짓말이 아니다. 한국어로 연구하는 것을 낮잡아 보는 것이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영어 논문 한편과 한국어 논문 한편은 금 1㎏과 감자 1㎏의 차이만큼이나 그 가치가 다르다. 한국어 논문은 대학에 따라 네편에서 여섯편을 써야 겨우 영어 논문 한편과 맞바꿀 수 있다. 그것도 인문이나 예술계 쪽만 허용하고, 자연계나 사회계에서는 아예 연구 실적으로 쳐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학문적 명성과 함께 거액의 장려금, 승진과 재임용의 길이 열린다. 그러다 보니 경력을 쌓아야 하는 연구자들은 영어 논문을 쓰려고 애를 쓴다.
물론 영어는 중요하다.
다른 나라 연구자와 학문적 대화나 연구를 이어 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문제는 영어 논문에 대한 우대와 압박을 받다 보면 지역적 현상을 서구의 주류 이론에 꿰맞추려는 경향과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더구나 언어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강제는 모국어로 연구할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언어는 이삿짐센터의 용달차처럼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고스란히 옮겨다 주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영어로 연구한다는 것은 영어의 개념 체계 안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모국어로 말하고 쓰는 연구를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시스템이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자국 공동체의 고유한 비극과 희망을
한국어로 온전히 사유해 낼 능력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곳인 동시에 공동체와 대화하는 곳이다.
세계와 대화하면서 공동체와 대화를 하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다.
대학은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