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몸만 오지 않는다

닭털주 2026. 5. 9. 13:08

몸만 오지 않는다 [말글살이]

 

 

2025116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아주 인터내셔널 데이행사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외국인 유학생들이 함께 모여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강의실에 한국어가 서툰 유학생이 열명 남짓 앉아 있다.

책 구했어?”

같은 쉬운 말도 알아듣지 못해 난감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그래서 이번 중간고사 때 처음으로 한국어 외에 중국어, 일본어, 미얀마어로 된 문제지를 만들었다. 답안도 자신의 언어로 쓰라고 했더니 큰 답안지에 알 수 없는 문자로 한가득 신나게써서 냈다. 처음으로 보는 의기양양한 얼굴이다. 답안지를 내기 전에 사진을 찍어 갖고 가서 한국어로 번역해 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길에서 만난 그 학생이 나에게 음료수를 건넨다.

난 괜찮아, 너 마셔라고 했지만,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은 너 나 할 것 없이 유학생 유치 전쟁 중이다.

하지만 대학이 내놓는 언어 정책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를 배워. 못하는 것은 너의 책임이지.

당연한말 앞에서 유학생의 고유한 재능과 정체성은 쉽게 지워진다.

한국어를 못하는 순간, 그들의 존재는 서툶이나 어리석음으로 번역된다.

본국에서 무엇을 공부했고 어떤 일을 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장난기가 있는지,

얼마나 다정하고 성실한 사람인지도 함께 사라진다.

한국어를 못하면 한 인간의 세계 전체가 지워지는 것이다.

한국어를 익히지 못하면, 그들에게 허락되는 일의 범위도 급격히 좁아진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식당 주방 보조,

청소,

농업이나 중소 제조업의 단순노동 같은 일들이다.

 

유학생은 몸만 오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온 언어를 받아들일 준비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한국식으로 살아가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한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한 인간을 서툰 사람으로 번역해버리는 사회는,

결국 우리 세계도 가난해진다.

'연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과 영어  (0) 2026.06.04
있잖아  (0) 2026.06.02
물로 보다  (1) 2026.05.02
모르다 [말글살이]  (0) 2026.04.24
미련 [말글살이]  (0) 202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