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얼어붙지 않는 한강과 한국문학

닭털주 2024. 10. 29. 09:49

얼어붙지 않는 한강과 한국문학

입력 : 2024.10.23 21:00 수정 : 2024.10.23. 21:08 성현아 문학평론가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벅찬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동료 작가들, 문학계 종사자들, 선후배 연구자들, 학생들과 서로 축하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한강 작가님이 이룬 쾌거이지만, 모두가 제 일처럼 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매일매일이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축제 현장 같다.

 

왜 이제 와서, 뒤늦게 한강 작가의 책을 읽냐는 비판도 있다고 한다.

다소 황당한 지적이다.

모든 나라의 작가와 작품을 알 수 없듯이, 한국 독자도 한국의 작가를 모를 수 있다.

구태여 수상작을 궁금해하는 예비 독자들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나면 세계 각국의 독자들이 선정된 작가와 그의 작품을 궁금해하면서 따라 읽곤 한다.

미리 알고 읽어두었다면 즐겁고 뿌듯한 일이고, 읽어보지 않았다면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면 될 일이다.

읽어 본 사람과 읽어볼 사람들이 각자의 다채로운 감상을 즐겁게 나누면 그만이다. 한 사람이라도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한강 작가님의 치열하고도 섬세한 문장들을 차곡차곡 읽어 이어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벅찬 일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그토록 먹먹해졌던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무용하다 여겨지는 문학을 붙들고 있다는 무력감과 외면하려 해봐도 드문드문 고개를 들던 모종의 억울함이 단번에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10년 넘게 국문학을 공부한 연구자이고 한국문학을 비평하는 평론가다.

한국문학은 대단히 가치 있다. 혼자 꾸역꾸역 되뇌던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작가들은 각자의 소중한 인생을 걸고 온몸으로 앓으면서 쓰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문학은 외국문학을 번역하여 흉내 내는 것일 뿐, 외국 작품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는 비하의 말을 심심찮게 듣기도 했다.

그러한 편견을 마주할 때면, 그렇지 않다고,

한국어로 쓰인 아름답다 못해 처연한 문장과 작가 스스로 내상을 입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애도의 몸짓들은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되는 숭고한 것이라고 항변하곤 했다.

그렇게 토론이 길어지다 보면 꼭 그 끝에서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봤자 노벨 문학상 못 받잖아.”

, 이제 받았다. 어떤가!

 

한강 작가님은 한국의 작가들이, 아시아의 여성들이, 자본이 아닌 다른 가치를 믿어 온 이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읽고 쓸 수 있게 해주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더불어 제주 4·3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특정 정치색을 지닌 사건처럼 몰아가는 이들이 조장해 왔던 불필요한 갈등까지 불식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된다.

 

지난 학기, 소설론 수업에서 한강 작가님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를 다루었었다. 문창과 학생들과 소설에 담긴 슬픔, 그 형상화 방식, 재현의 윤리 등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토론했던, 그러다 왈칵 밀려오는 타자의 고통에 울먹이는 학생을 달래주기도 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작가의 끈질긴 응시와 인물의 깨어진 영혼들을 훼손하지 않고 길어 올리려던 염결한 마음이 학생들의 눈빛에 서려 있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엔 아름다운 전환이 있다.

4·3 사건 당시 살아남으려 동굴에 숨었던 아버지는 딸에게 속솜허라”(들키지 않게 숨죽여 있어라)라고 말한다. 차디찬 폭력에 의해 얼어붙은 시신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힘껏 껴안으려는 이의 온기는 이 얼음장 같은 말을 솜 속에 들어온 것 같다는, ()의 포근함을 감각하는 말로 변주해 낸다.

프란츠 카프카는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다.

한강의 책들은 우리에게 메말라 버석하지만 붙잡으면 반드시 따스해질 손을 내민다.

얼어붙은 것들을 내내 녹이자고, 눈이 또 쏟아지면 그걸 녹여내어 함께 흘릴 눈물을 마련하자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