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과 문해력 [세상읽기]
수정 2024-10-29 19:32 등록 2024-10-29 18:41
김현성 | 작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는 사회적인 경사가 하나 있었다. 우리나라의 소설가인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라는 역사와 한강 특유의 시적 산문이 결합된 그만의 고유한 문학성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도 매우 기쁜 일이지만, 이 문학상이 우리에게 남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한글과 한국어’로 작성된 문학 작품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계인들에게 읽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글과 한국어는 우리 고유의 문자와 언어이지만, 왠지 이것은 우리나라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지 세계적으로는 통하지 않는, 그러니까 소위 ‘장사가 안되는’ 문자와 언어 취급을 우리나라 안에서도 꾸준히 받아왔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을 때 이들이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중 “한국어로는 랩이 안 된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도 한국어로는 힙합의 본토인 미국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주장들이 있었지만, 한국의 힙합신(힙합계)은 이를 비웃듯이 점점 몸집이 커져 지금은 하나의 어엿한 주류 대중문화 중 하나가 되었다.
한글과 한국어는 그 이후 2000년대 초반 1차 한류 붐을 타고 드라마를 필두로 한 영상 콘텐츠를 시작으로 하여, 2010년대 2차 한류 붐 때 케이팝을 위주로 한 대중음악이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제 영상과 음악을 거쳐 가장 장벽이 높은 장편 소설까지도 세계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어떻게든 한강 작가의 수상을 폄하하려 “번역의 승리다”와 같은 주장을 펼치지만, 그런 이들에게 다가가 그렇다면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외국의 명작도 단지 번역의 승리일 뿐이냐고 묻는다면 제대로 된 대답을 우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야구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 투수를 보고 투수가 잘한 것이 아닌 투수의 손이 잘한 것뿐이라고 평가하는 식의 견강부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작품을 보유하게 된 한국에서는 때아닌 문해력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한국교총에서 학생들의 문해력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는 투의 자료를 낸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자료는 문해력 하락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왜곡하여 전시하려 든다는 문제점이 있다. 청소년들이 과거 세대에 비해 어휘력이 하락했다는 것을 주로 지적하고 있는데, 어휘력은 문해력과 동의어도 아닐뿐더러, 그 어휘라는 것들이 대개 기성세대의 입맛에 맞는 한자어 위주의 어휘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당 자료에서는 ‘성명’이라는 한자어를 모르는 초등학생이 있다는 사례를 들었는데, 성명은 ‘이름’이라는 훌륭한 순우리말 단어가 있다. 또한 성명이라는 한자어는 성인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공적인 사유로 제출하게 마련인 서류에 주로 등장하는 단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실제로 초등학생은 성명보다는 이름이라는 단어를 실생활에서 더 접할 것이다. 즉 한국에서 이미 한자어라는 것은 대개 실생활에서 접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되어가고 있다. 오히려 한국어와 한글은 한자보다는 영어와의 접점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 2020년대의 대한민국이다. 실제로 당장 대도시 번화가에 나가면 상당수의 간판이 영어로 적혀 있지, 한자가 적혀 있는 모습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진다며 케케묵은 한자 교육을 다시금 꺼내드는 것은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글은 근본적으로 표음 문자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한자보다는 영어와 더 폭넓은 접점을 가질 수도 있는데, 한글 문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자 교육에 자라나는 세대를 가둔다는 것은 미래에 한국어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성세대에게 익숙한 언어를 기준으로 청소년, 청년들의 문해력을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우리에게는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해야 제대로 알아듣는다며, 외국어 표기 기준을 무조건 미국식 영어에만 맞춰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 하던 그런 허황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세계인이 ‘아파트’를 영어 원어 발음이 아닌 한국어 발음 그대로 외치며 한국 가수의 곡을 따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긴다.
미국식 영어에 무조건 우리 표기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나,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 한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들은 이런 시대의 변화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가.
케케묵은 문해력 논란은 이제 접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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