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송이와 다발 [말글살이]

닭털주 2026. 1. 10. 11:38

송이와 다발 [말글살이]

 

수정 2026-01-01 18:49 등록 2026-01-01 18:29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멋없고 무심하고 메마른 사람.

나는 꽃을 사거나 선물을 잘 하지 않는다.(이제는 아예 못한다.)

나와 인연 맺은 사람과 이 세상을 향한 정성이 부족해서겠지.

꽃 한송이 살 정성도 없으면서 능청스레 떠드는 말과 꿈은 말장난이자 헛꿈일 뿐.

 

송이는 꽃이나 포도처럼 한 꼭지에 매달려 둥글게 맺힌 생명을 셀 때 쓴다.

한송이라고 하면 그 자체로 온전한 우주이다.

어린 나이에 생명을 잃은 이에게 못다 핀 한송이 꽃이라고 하는 것도

생명의 유일함 때문이다.

송이란 말을 쓸 수 있으려면 한 꼭지에 달려 있느냐가 중요하다.

꼭지에 장미꽃이 하나만 매달려 있어도 장미 한송이이고,

포도 알갱이가 100개 넘게 달려 있어도 그냥 포도 한송이이다.

개수는 중요하지 않다.

포도알이 작고 성글어도 한송이, 굵고 촘촘해도 한송이.

난 것 그대로, 보태지도 빼지도 않은 그 자체.

 

다발은 수상하다.

꽃다발처럼 본래 따로따로인 것을 끈으로 묶어 부피를 키우고 그럴싸하게 만든 것이다.

졸업이나 생일을 축하하면서 꽃 한송이만 주면 좀 서운해할 듯.

적어도 한다발은 안겨줘야 축하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다발은 우리에게 무엇이든 한 덩어리로 뭉쳐놓아야 을 쓸 수 있다고 속삭인다.

부정과 비리에도 늘 띠지로 묶인 돈다발이 오간다.

욕망의 크기는 송이가 아니라 다발로 세어지는 법.

 

다발 속에 묶이면 꽃은 익명이 된다.

조직이라는 다발에 붙잡히면 라는 고유성은 사라지고 덩어리의 일부로만 보인다.

새해에도 꽃 한송이 못 사는 건 여전하겠지만, ‘다발이 아닌 송이로 살고 싶다.

어깨에 내려앉는 눈 한송이는 얼마나 대견한가.

'연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쉬운 말이 정의다 (2) [말글살이]  (0) 2026.01.18
쉬운 말이 정의다  (0) 2026.01.10
엄지발가락  (0) 2025.12.27
한통속 [말글살이]  (0) 2025.12.21
뚱딴지 [말글살이]  (0) 202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