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발가락 [말글살이]
수정 2025-12-25 19:30등록 2025-12-25 18:53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뒷집 명훈이는 엉뚱했다.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할 때 발부터 씻고 그 물에 얼굴을 씻었다.
왜 그러냐고 하면 얼굴보다 발이 더 고생하니 먼저 씻겨 준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무거운 몸을 떠받치고 먼지를 뒤집어쓴 발에 대한 그 친구만의 예의였다.
단어의 세계에서 발은 찬밥 신세다.
발가락을 하나씩 가리키며 이름을 불러 보시라.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손가락은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 새끼손가락’ 등 저마다 의젓한 이름이 있는데,
발가락은 엄지와 새끼를 빼면 변변한 이름이 없다.
그냥 둘째, 셋째, 넷째발가락이라고 한다. ‘엄지’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라고 하지만,
엄지손가락이 대표 자리를 차지한다. ‘엄지척!’이란 말을 하면서 발가락을 들어 올리지는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신발 속에 갇혀 한 덩어리로 움직이니 굳이 이름을 따로 불러줄 일이 없었겠지.
생김새도 엄지발가락이 좀 굵은 것 말고는 다 고만고만하게 생겼다.
내 엄지발가락은 유독 위로 솟아 있는데, 양말에 구멍도 잘 나고 신발을 사도 엄지발가락 부근이 튀어 올라 모양이 찌그러지고 빨리 낡는다. 아침에 신은 새 양말을 저녁에 벗어 보면 엄지발가락 쪽이 볼록 올라와 있고 색도 바래서 헌 양말이 되어 있다. 축구를 하면 어김없이 엄지발톱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빠져 버린다. 조심성이 없어 수시로 발 아래 물건을 걷어차는데, 그때도 비명을 지르는 건 제일 앞장선 엄지발가락이다.
양말에 난 구멍과 멍든 발톱이 부끄럽진 않다.
그건 내가 멈춰 있지 않고 어디로든 가고 있다는 증거.
늘 주춤거리며 사는 ‘쫄보’지만, 내 몸의 맨 앞에 엄지발가락이 있다.
가장 먼저 부딪히고 가장 먼저 깨지는 나의 최전선, 엄지발가락.
'연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쉬운 말이 정의다 (0) | 2026.01.10 |
|---|---|
| 송이와 다발 [말글살이] (1) | 2026.01.10 |
| 한통속 [말글살이] (0) | 2025.12.21 |
| 뚱딴지 [말글살이] (0) | 2025.12.16 |
| 정신을 차리다 (0) | 2025.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