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함의 그림자
수정 2026.06.10 20:14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은행 자동화창구 앞에서 한 어르신이 다급한 듯 손짓했다.
이체를 하려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화면을 들여다보니 보이스피싱 방지를 위한 몇 가지 질문 앞에서 멈춰 계셨다. 읽고 답하면 될 것 같지만, 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 몇 문장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어르신은 버스요금 납부 안내서를 들고 있었다.
교통카드를 깜빡하고 버스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후불 납부 안내장을 건넨 것이다. 현금 없는 버스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현금 이용이 줄면서 수납 비용과 운행 지연, 안전사고 위험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도입됐고, 일부 지자체는 이미 전면 시행 단계에 들어섰다.
서울에서도 상당수 노선이 현금 없이 운영 중이다.
하지만 어떤 승객에게 그것은 버스를 타는 일보다 더 어려운 사후 처리 절차가 되기도 한다.
버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음식점이나 카페의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포기하게 된다는 노년의 이야기는 이제 특별한 뉴스 축에 들지 못한다. 복지관과 주민센터에서 어르신 대상 휴대전화 활용법 교육이 오래 이어져온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잘 모르겠고 골치 아프다고 버티기에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었다.
나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갑자기 TV가 안 나온다, 와 이라노?”
“인터넷뱅킹이 갑자기 안 된대이”
300㎞ 가까이 떨어져 있지만 이런 순간 엄마가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나다.
지나고 보면 대개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그 문제를 옆에서 함께 겪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디지털 절차 앞에서 멈춰 서는 일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지난 5월 종합소득세를 신고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년 이 일을 반복하고 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이 절차를 이렇게 ‘셀프’로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말이다. 올해도 긴가민가하며 신고를 마치는 동안 휴대전화에서 수시로 알림음이 울렸다. 환급금을 놓치지 말라며, 수수료를 내면 대신 처리해준다는 광고 메시지였다.
간편하다는 말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간편함을 내세우는 것은 민간 대행 서비스만이 아니다.
국세청도 세무 경험이 많지 않은 납세자를 위해 수입금액부터 납부·환급 세액까지 미리 계산해 안내하는 ‘모두채움’ 서비스를 확대해왔다.
다만 간편하게 끝나는 것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일까.
내 소득이 어떻게 집계되고, 어떤 기준으로 세금이 매겨지는지,
지금 형편에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무엇인지 정도는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득이 적거나 불안정할수록 더 면밀히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런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평생 목수로 성실히 일했지만 심장질환으로 당분간 일은 무리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은 59세의 다니엘. 질병 관련 수당을 신청했지만 형식적인 심사 끝에 지급 대상에서 탈락하고, 실업수당 신청은 ‘온라인’이라는 벽에 막힌다.
이후 주변 도움으로 신청에 성공하지만 인증 기간이 지나 그마저도 놓친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다니엘은 관공서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내 이의신청 날짜를 요구한다”고 스프레이로 휘갈기는데, 얼마 뒤 이의신청 절차를 앞두고 마음을 추스르려 물세수를 하던 그는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특별한 배려가 아니었다.
자기 사정을 말할 자리,
자기 힘으로 이의를 제기할 기회,
그리고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었다.
간편함은 필요하다. 디지털 전환도 피할 수 없다. 보이스피싱 방지 절차도, 현금 없는 버스도, 온라인 세금 신고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될 때다.
“온라인으로 하시면 됩니다”만 반복하는 사회는 어쩌면 누군가를 절차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간편함은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도착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몇 번의 클릭이면 끝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버스 안내문 한 장을 들고 은행까지 걸어오는 하루가 된다.
그러니 편리한 사회일수록 사람을 만나는 창구는 더 오래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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