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고프다”…‘고프다’의 배신? ‘배’의 가출? [말글살이]
수정 2024-02-08 15:38 등록 2024-02-01 14:30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농담 투로 말하면, 나는 ‘과학자’다(말하고 나니 정말, 가소롭군).
과학자로서 품은 욕심 중 하나는 말뜻이 어디로 튕겨나갈지를 예측하는 것.
‘한치 앞’을 알고 싶어 한달까. 하지만 매번 실패다.
한치 앞의 사람 일도 알 수 없는데, 말의 한치 앞을 알 턱이 없지.
방금까지 좋아 죽던 사람이 세치 혀를 잘못 놀려 일순간 원수가 되듯이,
낱말은 자신이 밟을 경로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순간 변해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알아차릴 뿐이다.
‘고프다’가 대표적이다.
‘배 속이 비어 음식이 먹고 싶다’는 뜻의 이 낱말은 ‘배’와 결코 떨어질 일이 없었다.
몸에서 음식이 먹고 싶은 곳이 배 말고 달리 어디가 있으리오.
반대말인 ‘(배)부르다’는 다르다.
고픈 건 애써 감출 수 있지만, 부른 건 볼록 튀어나온 배 때문에 숨기기 어렵다.
그러니 가운데가 봉긋 솟아오른 물건들에 두루 쓰인다.
‘배부른 장독대’나 ‘배부른 기둥’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요새 ‘고프다’와 만나는 낱말이 많아졌다.
밥 고프다, 술 고프다, 정 고프다, 사랑 고프다, 사람 고프다….
이런 예들이 생겨나니 ‘배’와 ‘고프다’가 맺고 있던 불가분의 관계가 의심스러워진다.
이것은 ‘고프다’의 배신인가, ‘배’의 가출인가?
둘의 분리는 ‘고프다’에 처음부터 있던 가능성이었는가, 나중에 생긴 건가?
‘고프다’가 조금씩 ‘그립다’로 읽힌다면, 이 삿된 세상에선 그 그리움의 목록은 더 늘어날 것이다.
떠나간 가족이 고프고, 함께 나눌 저녁밥상이 고프다.
진실과 정의가 고프고, 평화와 평등이 고프다.
돈과 권력으로 ‘배부른’ 자들에겐 그것이 한낱 성가신 짐이요,
떼어 버리고 싶은 노리개로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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