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해탈을 가로막는 그 상상들 [말글살이]
수정 2024-02-15 18:41 등록 2024-02-15 14:30
게티이미지뱅크
망할 놈의 상상.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만이 아니라, 빠듯한 현실에 허덕거리며 사는 사람도 틈만 나면 상상을 한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라고 하던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상상은 해탈을 가로막는 마귀. 그 마귀가 낳은 아들은 번민.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얌전히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도 함께 떠올린다.
마치 이미 벌어진 일이 벌어지지 않은 일들까지 모두 데리고 다니는 것 같다.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표현하는 언어적 장치가 가정문(조건문)이다.
대표적으로 ‘만약 ~라면’.
‘그곳에 갔다’ ‘그 말을 했다’ ‘놀았다’ ‘로또를 안 샀다’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인데,
꼭 ‘그곳에 안 갔더라면’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놀지 않았다면’ ‘로또를 샀더라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 다음에는 흔히 후회나 비난의 말이 따라온다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사고를 피했을 텐데).
가끔은 안도하는 마음을 담기도 한다
(그때 안 놀았다면, 언제 놀았겠어!).
가정문은 실현 불가능한 걸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내가 너라면’ ‘내가 하늘이라면’
‘눈이 머리통 뒤에도 하나 달렸다면’
‘이 정부가 뭇 생명을 존중한다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온다면’.
피식.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네.
우리는 매 순간 갈림길 앞에 선다.
외줄을 타듯 순간마다 단 하나의 말과 단 하나의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생은 벌어진 하나의 일보다 벌어지지 않은 수많은 일을 어떻게 대하고 상상하느냐에 따라
행과 불행이 갈리는 건 아닐지.
이번 생에서 해탈은 글렀다. 망할 놈의 상상과 친해지는 수밖에.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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