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책 한권에 수많은 노동이 깃들어 있다 [6411의 목소리]

닭털주 2025. 2. 2. 10:35

책 한권에 수많은 노동이 깃들어 있다 [6411의 목소리]

수정 2025-01-27 12:06 등록 2025-01-26 17:13

 

 

필자의 출판사에서 출간한 그림책의 원화 전시물을 서울식물원 어린이정원학교에 설치하는 필자. 필자 제공

 

 

오창록 | 출판노동자

 

 

책 한권이 출간되면 대개 저자만 주목받는다. 거기에 더한다면 출판사까지.

만약 책이라는 물성에 집중하는 애독가나 장서가라면 판권을 보며 출판사의 대표자나 책임편집자의 이름도 살필 것이다.

하지만 책 한권에는 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출판노동이 더 깃들어 있다.

책을 홍보·마케팅하는 마케팅부서,

책을 꾸미는 디자인부서,

책의 윤곽을 잡는 제작부서,

각종 영업 지표를 관리하는 영업관리부서,

전자책 같은 2차 저작물이나 소셜미디어(SNS),

웹툰·웹소설 등 각종 매체를 담당하는 부서,

회사의 살림을 도맡는 인사총무·경리부서,

책을 제작하는 인쇄소,

책을 보관하고 운반하는 물류 부문,

관련 업무를 밖에서 수행하는 외주노동자,

원활한 사무 환경을 조성하는 환경미화원과 관리원,

단순 업무의 아르바이트까지.

책 한권에는 이렇게 수많은 출판노동이 페이지마다 켜켜이 새겨진다.

 

ㄱ출판사에서 마케터로 일하며 자긍심과 소속감을 느낀다.

회사에서 출간하는 책을 좋아하며 회사 책이 더 많은 독자에게 가닿길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책이 제작되고 유통되는 과정 곳곳에 우리 출판노동자의 노동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운동성사업성이라는 이중 과제가 경영 기조로 표방된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시대정신과 패러다임을 창출하면서 건강한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도 경영 논리와 노동 의식이 각축전을 벌이는 기업 현장이다.

그룹의 총괄 경영진은 2009년에 경영상의 이유로 분사한 그룹사 ㄷ을 경영 악화와 부채 문제 등으로 다른 그룹사 ㄱ과 ㄴ에 통폐합한다고 발표했다. 전망이 어두운 출판 시장에서 경영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자 그룹이 상생하는 길이라고 밝혔다.

ㄷ에 소속된 출판노동자들은 다니던 회사가 졸지에 없어지는 허망함을 맞닥뜨렸다.

이번 이슈는 그룹사 전체 노동자에게 혼선과 불안을 안겼다.

 

나는 노동조합의 지부장이다. 통폐합 이슈가 발생한 뒤부터 지부는 긴밀하게 대응해왔다.

경영 실패의 책임을 물으며 공개설명회 개최와 조합원 고용승계 및 근로조건 보장 등의 협의를 요구하는 공문을 사쪽에 보냈고 일정한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한계가 분명하고 힘에 부칠 때도 많다. 집행부와 대의원 모두 비전임이라 평소에 회사와 노조 업무를 병행한다.

 

어느 업계나 그렇듯 출판사의 경영 논리와 사정은 사회·구조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보장되고 존중받는다.

출판계 종사자가 약 27500명인데, 출판노조 가입률은 고작 1.2% 남짓이다.

 

출판계 노조에서 활동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출판노동자들의 마음을 영악하게 이용하는 출판사가 제법 있다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니까, 이 정도쯤은 할 수 있잖아

하는 말들로 노동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거나,

심하면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행위를 일삼는다.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편집자에게 저자의 대필을 시키거나 디자인·마케팅 업무까지 맡기고,

마케터에게 업무를 가장한 사장(또는 상사)의 개인 심부름이나

이런저런 잡일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직무도 경험하면 출판의 시야가 트인다는 식으로 저비용 고효율의 경영 논리를 교묘하게 주입한다.

지시를 듣는 태도가 달갑지 않다는 이유로

괘씸죄를 적용해 조직에서 따돌리거나 전혀 다른 직무로 발령하는 사례도 많다.

외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계약서 없이 일하는 관행은 기본이고, 이삼십년간 작업 단가는 그대로다.

 

받을 돈은 빨리 받고 줄 돈은 최대한 지연하는 게 경영의 기술이다.”

어느 사장의 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괴롭힘의 양상은 제각각이어도 그 끝은 대개 하나로 귀결된다.

당사자의 자발적 퇴사를 유도하거나 일감을 끊어버리는 것.

출판은 사양산업이다라는 말은 출판노동자들을 압박하고

이익 배분의 정당한 요구를 봉쇄하는 프로파간다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나는 앞으로도 나의 소중한 일터가, 우리 출판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노동자의 노동 환경과 권익을 존중하는 게 최우선이다.

 

출판노동자로서 내 바람은 분명하다.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문화적 가치를 보전하는 출판생태계를 짊어지고 가치를 구현하는 건 누구인지 헤아려 주시기를, 책 안팎에 새겨진 수많은 출판노동자의 흔적과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기를 소원한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