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소설이다]
소설의 힘과 가치
허희(문학평론가)
2025. 1+2.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들
2024년 2학기, 내가 어느 대학교에서 맡았던 강의는 〈소설창작연습〉이었다. 소설가가 아닌 평론가가 소설 창작 과목을 가르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길 사람이 많으리라. 사실은 나도 그랬다. 하지만 소설 창작이란 자고로 타인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는 데에서 시작하며, 습작에 대한 생산적인 비평과 피드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가르치지 못할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의 계획서의 교과목 목표는 “소설의 힘과 가치를 이해한다.”로 정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소설의 범주를 문학으로 넓혀 생각하면 먼저 이런 주장이 떠오른다.
문학은 배고픈 누구 하나 구하지 못할 만큼 실질적인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실질적 쓸모가 있는 것은 우리를 대개 억압하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돈이 그렇다.
돈은 쓸모가 많지만 바로 그로 인해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글로벌 메가 히트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라. 드라마 속 게임에 참석한 많은 인물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 수 있음을 알아도 게임을 지속하길 바란다.
본인 생명과 맞바꿀지언정 빚을 갚기 위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돈처럼 유용하지 않은 문학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은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구속의 형태와 조건을 돌아보게 하고 그것에 대해 심층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문학은 이른바 ‘무용성의 유용성’으로 그 역할을 해낸다. 이는 문학평론가 김현의 입론이다. 그는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냐’라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현 문학전집 1』(문학과지성사, 1991), 49~50쪽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그의 대답은 여전히 나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은, 체득이 부재한 깨달음은 얼마나 헛된가. “소설의 힘과 가치를 이해한다.”는 강의 목표는 말 그대로 지향점일 뿐, 나는 학기가 끝날 때 학생들이 각자의 답을 스스로 찾길 바랐다.
그렇게 개설된 〈소설창작연습〉의 개강 전에 나는 꽤 많은 메일을 받았다. 요지는 해당 과목을 꼭 듣고 싶으니 수강 인원을 늘려달라는 요청이었다. 문예창작학과가 없는 대학이고, 창작 수업도 드물게 개설되는 터라, 이에 대한 갈증이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예상보다 열띤 반응에 놀랐다.
수강 신청에 실패한 한 학생은 “문학과 동떨어진 공부를 하며 살지만, 글을 읽고 쓰는 일에서 숨이 트이는 이십 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소설을 완성해 보고 싶었으나 가장 크게는 끌고 갈 힘이 없었고, 지식도 없이 무작정 써놓고 보면,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무단 복제하고 있는 꼴 같아 더 이상 쓸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 수업을 통해 기술적인 면을 부단히 익히고, 이야기는 그럼에도 힘이 있다는 걸 다시금 배우면서 소설을 끝까지 완성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습니다.”라며 열정 가득한 보낸 메일을 보내왔다.
이를 거절할 선생이 과연 어디 있을까. 나는 학생들이 소설의 힘과 가치를 느끼길 바라며 최대한 수강 인원을 늘려 수업을 진행했다.
소설은 존재와 연동하는 언어 예술
놀라웠던 점은 문학 전공생뿐만 아니라 앞서 인용한 메일을 보낸 학생처럼 문학 비전공생들 역시 소설 쓰기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한 열망은 풍부한 소설 읽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가 말하지 않았던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는 영화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되풀이해 보고, 그러다 영화 비평을 쓰게 되며, 결국 직접 영화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간다고. 학생들은 체험의 폭과 깊이가 아직 미진할지라도 이와 같은 경로를 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나름대로 성실하고 우수한 독자였다. ‘성실하다’는 것은 이들이 자의로 책을 찾아 읽어왔다는 사실에서, ‘우수하다’는 것은 이들의 독서 이력이 한국 문학, 외국 문학, 순수 문학, 장르 문학 등에 얽매이지 않고 소위 ‘좋은 작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국적이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을 읽으며 문학적 자양분을 쌓아왔다.
이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더욱 놀라운 점이다. 자국 문학 외에 세계문학전집에 친숙하고, SF·판타지 문학 등 장르 문학이 부상하면서 순수 문학과의 경계가 해체되는 와중에, 소설에 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여기에 드라마와 영화까지 포함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범람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형성된 소설에 대한 관념이 기존 소설의 영향력 아래에만 놓여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소설은 전통적으로 이야기의 창안과 향유를 담당하던 유력한 미디어였지만, 이제는 유사한 미디어의 수가 급증하며 이야기를 독점하다시피 하던 소설의 권한도 축소된 것이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소설창작연습〉을 신청한 학생들은 소설을 써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는 소설이 다른 서사 매체와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의 본질이 영상 예술이 아니라 언어 예술이라는 점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이쯤에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유명한 정의, “언어는 존재의 집”을 떠올려 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단순히 기능적인 소통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언어는 우리의 존재가 거하는 집이며, 반대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존재에 영향을 끼친다. 물론 언어는 여타 모든 것이 그러하듯 불완전하다. 언어라는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記標)와 기의(記意)의 조합은 자의적이고,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도 0이 아닌 탓이다. 그러나 언어가 가진 불완전함의 한계를 받아들인 채, 인간은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비록 결점이 있더라도 언어는 존재와 직결되는 가장 신뢰할 만한 수단이다.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 의식의 저변을 차지하는 무의식을 연구하기 위해 꿈을 분석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를 떠올려 보라. 그는 자신의 꿈을 언어로 기록했고, 타인의 꿈을 언어로 치환시켰다. 성경의 창세기도 마찬가지다. 태초에 신은 “빛이 있으라.”라고 언어로 명령하여 모든 존재를 창조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맥락에서 언어 예술로서의 소설은 나와 타인, 나아가 세계의 존재성을 탐구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이야기가 소설의 전부일 수 없는 이유다. 특히 좋은 소설은 반드시 현존재의 내용과 형식을 심문한다. 또한 모든 존재는 세계 속에서 함께한다는 점에서, 소설은 한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다른 이들과 세상 사이의 조화 혹은 부대낌까지 존재성의 과업으로 삼는다.
철학적으로 세련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소설창작연습〉을 신청한 학생들은 소설 읽기와 쓰기가 인간 존재의 문제를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노력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듯했다. 오늘날 우리는 먹고 사는 일, 아니 남들보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근사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 과도하게 신경 쓰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자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의 말처럼, 소유보다 존재하는 삶에 가중치를 두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소설을 읽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을 쓴다. 그들은 소설이 킬링타임용 이야깃거리에 그치지 않다는 것을, 작아 보이는 개인의 서사를 통해 세계를 얼마나 넓고 깊게 체감할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새로운 인식적 통찰과 섬세한 감각적 충격을 동반하면서, 모든 존재의 양상이 결코 단순하지 않으므로 세상과 인간에 다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일깨운다.
소설 읽기는 자유를 향한 갈망
나는 〈소설창작연습〉에서 플롯 짜기와 캐릭터 형성 등 기술적 요소를 다루었으나, 그보다는 하나의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수업 교재로 삼은 존 가드너(John Gardner)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창작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첫 번째 법칙이자 마지막 법칙은, 비록 쉽게 출간될 수 있는 평범한 소설―모조 소설―을 위한 법칙은 있을지언정 진짜 소설을 위한 법칙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 창작이란, 결국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터무니없는 것을 용인되게 만들면서 모든 예술가들이 느끼는 가장 큰 기쁨들 중 하나인 것이다.”
- 『소설의 기술』(교유서가, 2018), 23~24쪽
가드너의 말처럼 소설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이다. 문학의 힘이 ‘무용성의 유용성’에 있는 것과 같이, 법칙 없음의 법칙이야말로 역설적인 소설 작법의 원칙임을 나는 한 학기 내내 학생들에게 주지하였다. 물론 그것이 아무리 모범적 사례일지라도 모두가 똑같이 따라 쓸 필요는 없다. 나는 평소 한강 작가의 문학을 좋아하고 또 그는 2024년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인정받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습작생이 한강 작가처럼 써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는 창작에 어떤 틀을 전제하지 말 것을, 누군가의 아류가 되기보다는 조금 어설프더라도 독창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추구하는 ‘소설의 자유’와도 결부된다.
나는 온갖 종류의 고정관념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바르게 살자.”는 도덕론을 전파하려면 설교 등 소설보다 더 나은 전달 방식을 얼마든지 모색해 볼 수 있다. 선량한 인물만 가득한 사회의 갈등 없는 화합을 담아내는 양식으로 소설은 어울리지 않는다. 도리어 소설은 ‘바르게 살지 않는’ 자들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냄으로써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게 한다.
예컨대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불리는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의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1866)을 보자. 이 작품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Raskolnikov)는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동생까지 살해한 살인자다. 만약 이 사건이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 뉴스에 보도되었다면, 세간의 반응―‘좋아요’를 많이 받은 댓글은 대체로 “사형제를 부활시켜 집행해라.”,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라.”와 같을 것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첫 번째 반응은 논외로 치더라도, 두 번째 반응은 고민할 여지가 있다. 근래의 한국 콘텐츠들은 피해자 권리를 우선하고, 애도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는 이러한 흐름에 동의하면서도 피해자를 조롱하거나 가해자를 찬양하려는 목적이 없다는 가정하에 소설은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는 쪽에 서 있다. 『죄와 벌』이 적절한 예시다. 도스토옙스키는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이 작품을 쓰지 않았다.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의 무게와 벌의 크기를 진지하게 가늠해 보게 된다. 이 작품은 법적인 처벌로 끝내는 수많은 대중 서사의 엔딩과 달리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른 인간이 과연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를 구체적이고 실감 나게 형상화했다.
이것이 좋은 소설은 반드시 현존재의 내용과 형식을 심문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흔히 소설을 읽으면 인간과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깊어진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자기계발서 류에서 설파하는 인간과 세상을 보는 실용적 눈과는 다르고, 타자에 대한 얄팍한 공감이나 편향적 이해와는 무관하다. 소설에 몰두하는 것은 세계와 상호 작용하는 존재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섬세하게 돌보는 행위와 같다. 하나 마나 한 위안이나 편향된 이해를 넘어서, 불투명한 존재에게 어떻게든 가닿는 일. 이로부터 소설은 특유의 힘과 가치를 얻는다. 〈소설창작연습〉 종강 날, 학생들도 이와 비슷한 소감을 전했다.
#소설#문학#소설의 힘#죄와 벌#소설창작연습출판N
허희 문학평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2012년 계간지 〈세계의 문학〉 평론 부문에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과 관련된 글쓰기, 학교 강의, TV와 라디오 출연 등을 통해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다. 비평집 『시차의 영도』(민음사, 2019), 산문집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추수밭, 2021), 『당신의 독자적인 슬픔을 존중해』(백조, 2023)를 썼다.
samdoli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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