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세상이라는 종이에 맘껏 얼룩을 남기려는 자 [.txt]

닭털주 2025. 1. 11. 10:30

세상이라는 종이에 맘껏 얼룩을 남기려는 [.txt]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수정 2025-01-11 09:09 등록 2025-01-11 07:00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 l 이반지하, 창비(2024)

 

 

내 방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오랜 시간 거실에서 생활했다.

식구들이 스쳐 지나가는 공간에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모종의 책임감이 습관처럼 배었다.

지붕 아래 모두를 챙겨야 한다는 강박.

꼭 거실 찬 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자던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과 닮았다.

할머니 집에는 큰 마루와 작은 방이 세 개 있었는데,

할머니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교차로 같은 방에서 이불을 깔고 생활했다.

잠귀가 밝은 할머니는 바깥의 인기척을 느끼면 바로 몸을 일으켜 밥은 먹었느냐 물었다.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몸의 역사.

 

엄마는 요즘 수영장에 다닌다. 엉덩이를 가리는 펑퍼짐한 상의만 입던 엄마는 휴가를 떠나도 절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동생의 권유로 억지로 집 앞 수영장을 견학한 엄마는 다양한 몸이 거리낌 없이 움직이고 유영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 몸 여기 있어도 괜찮네?’

엄마는 검정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물살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수영복을 입게 될 줄 몰랐어. 근데 물 너무 좋아.”

일주일에 세 번, 수영장에 다녀온 엄마는 수영복을 빨아 뽀송하게 말린다.

 

옆집 가피는 지난해에 중고차를 샀다. 청소년기부터 K-장녀, 가장의 역할을 떠맡아 일찍이 노동 전선에 뛰어들었던 가피. 다른 식구에게는 새 차를 선물하고, 동생들에게 매달 월급 같은 용돈을 팍팍 써왔다.

그런 가피도 결국 가족 모두가 탓하는 장녀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결심하고 가족과 단절한 뒤, 가피는 충동적으로 중고차를 샀다.

여태껏 자기에게 쓰는 돈은 다 사치라고 여기던 가피는 말간 얼굴로 말했다.

어제는 운전해 속초에 갔어요. 바다 보며 글을 썼어요. 이 좋은 걸 왜 이제 저에게 허락했을까요?”

 

엄마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내가 진행하는 독서 모임에 초대한 날, 엄마는 손바닥을 연신 닦으며 말했다.

나 책 모르는데. 뭐 물어보면 어떡해.”

그날 그녀는 책은 많이 못 접했지만,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왔노라 답했다.

또래 모임도 생겨, 며칠 뒤 모임에 다녀오더니 말했다.

누가 전공이 뭐냐고 묻는 거야. 나 대학 안 나왔잖아? 식은땀 났는데, 그냥 나는 음악을 좋아해요말해버렸어.”

고민 없이 학력을 묻는 편견에 그녀는 우아하게 응수했고, 자리에는 박수가 터졌다고 한다.

 

어떤 몸이 자기만의 방을 누린다.

보이는 몸에서 잠시 벗어난다.

자기를 위해 돈을 쓴다.

인도와 도로를 횡단한다.

두려움을 부딪친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답을 한다.

이토록 작은 변화를 작게 보지 않게 된 건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덕분이다.

일반이 아닌 이반지하는 보이지 않는 벽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

성소수자에겐 허락되지 않은 결혼식에서 사회 보고,

강연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을 뚫고 강단에 서고, 도로를 달린다.

반듯한 공간을 침투하며, 위선과 구분과 억압을 비웃는다.

아주 깨끗한 흰 종이를 보고 싶었고, 그 종이에 첫 더러움을, 어둠을 묻히는 자가 되고 싶었다.”

세상은 종이. 나라는 존재를 움직이고 부딪쳐 얼룩을 남긴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당신들과 나는 감히어디를 훼손할까. 이것은 내게 남은 유일한 새해 기대다.

 

홍승은 집필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