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그림책의 해’ 그림책 문화의 현재와 미래
특집
2022년과 2023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내맘쏙 : 모두의 그림책 전’과 ‘백희나 그림책전’은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2024년 여름에 순천그림책도서관에서는 ‘여름의 무대, 이수지의 그림책전’이 절찬리에 진행됐다. 전주국제그림책도서전은 시민 활동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내년에 4회를 맞는다.
그림책을 사랑하며 자녀를 키우고 성장해 온 사람들은 전주를 그림책의 도시로 키워내는 중이다. 전주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원주는 그림책을 일상예술로 만드는 예술 향유자 시민들의 성장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으며 순천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전문가들이 찾아오는 알찬 기획전을 여러 차례 성공시켰다.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열린 배경에는 이러한 여러 도시의 역사가 있다.
지난 10여 년 세계 그림책 무대에서 펼쳐진 우리 작가들의 활약은 그림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열정으로 연결되었다.
독자들은 더 이상 해외 그림책, 특히 영어권 그림책에 무조건 환호하거나 매달리지 않는다. 현장 독자들의 질문을 들어보면 세계 그림책의 미래는 우리 그림책 문화에 달려있다는 설렘도 느껴진다.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위기
그러나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긴박하다.
이렇게까지 그림책을 사랑하는 분들이 많은 줄 몰랐다는 말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그림책에 대한 여러 잡지의 특집 기획이 현실에 대해서 여러 제언을 던지고 ‘대한민국 그림책상’ 제정을 비롯해서 그림책이 제도권 안에서 언급되는 빈도는 높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공공의 영역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면 “그래도 그림책 예산은 줄어들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듣지만 출판 불황 속에 책을 팔아 현실의 하루를 사는 창작자들에게는 먼 얘기처럼 들린다. 다른 분야에서는 “그림책은 요즘 좀 잘 팔리지 않나요?”라고 말하는데 실상은 다르다. 판매량은 외부의 화려한 열광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작가들은 소리 없이 고사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마지막 작품을 낳듯 작품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이 분야를 아는 사람은 늘어났는데 이 분야에서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흐름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책의 종수가 늘어나면서 마케팅 경쟁은 치열하고 물가 상승에 따라 제작과 유통비용이 몇 배 더 상승할 수밖에 없는 그림책의 물리적 특성 때문에 새 책은 점점 내기 어려워진다. 작가들을 만나면 도대체 어떤 책이 팔리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한다.
조금만 더 하면 세계적인 작품을 낼 수 있을 것처럼 신진 작가들을 독려하는 주위의 과열된 분위기는 시작하는 작가들을 더욱 큰 우울감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실제로 그림책작가들의 고립감은 비대면 시대를 거치고 출판 불황을 겪으면서 급격히 높아졌다. 중견 작가들조차 그림책 판매량이 급감한 상황 속에서 투자가 필요한 신인 작가들은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각종 공모전이나 신인 모집의 장치들도 이후의 안정적 창작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작가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특단의 심리적·물리적 지원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신진 그림책 창작자의 활동 토대가 한꺼번에 무너져버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그림책작가들을 위해 심리 지원을 포함한 생계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 그림책의 발전을 만들어낸 것은 작가 개인들의 희생과 노력이었다.
이는 개별적인 기적이다.
한국의 그림책을 자랑스러운 예술 콘텐츠로 내세우겠다는 것이 정책 집단의 계획이라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작가들이 작품을 그리고 쓸 수 있도록 기본 토대는 생존에 대한 지원으로부터 시작된다.
민간의 자조 모임이나 공동체적 해결의 노력과 별개로 정책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우리 그림책이 이룬 성취에 대해서 국가적 자랑으로 내세우기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신인 작가와 성장 중인 출판 전문가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한 권의 책’이라는 예비 예술인 지원 사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기초생활지원금이 포함된 프로젝트였다. 그 과정에서 복지 지원과 창작 지원이 병행되었을 때 창작자의 예술적 성취 의지와 성과가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비슷한 경험을 지닌 선배 창작자에게 일정 횟수 이상의 멘토링을 요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포함하고 있었다. 멘토링은 일종의 심리 지원 역할을 했다. 한 사람의 신진 예술가가 성장하려면 다각도의 조력이 필요하다.
그림책을 향유하는 방식의 다각화
우리 사회가 그림책을 향유하는 방식은 나날이 새롭게 그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그러나 최근 달라진 국가 예산 집행 내역들을 살펴보면 작은 혈관과도 같은 독립책방이나 작은 도서관과 전시장, 그림책을 읽는 독자 공동체, 학교 동아리 등을 지원하는 부분은 대폭 줄어들었다. 민간에서 오랜 노력으로 구축해 온 그림책 감상의 문화와 그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해 온 향유 방식들은 갑작스럽게 막다른 골목에 놓인 셈이다.
다음은 지난 2024년 1월 한 달 간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그림책 관련 행사만을 정리해 본 것이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얼마나 다양한 구심점들이 그림책 문화를 펼쳐나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민도 있다. 우선 그림책 향유의 중요한 거점인 독립책방들의 노력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살펴본다.
서울 연희동의 달걀책방은 ‘『그날 밤 계란말이 버스』 아트프린팅 전시회’(김규정 작가 전시)와 ‘사라진 나라의 이야기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명아 번역가 진행)을 열면서 그림책의 그림과 글에 대한 독자들의 경험을 넓히는 행사를 마련했다. 서울 합정동의 비플랫폼은 ‘종이의 특성과 활용 원데이 워크숍’(두성종이 손지희 강의)을 열어 그림책작가와 출판인들이 물성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책방짙은은 ‘김선진 작가 그림책 원화전 『나의 작은 집』’을, 책방사춘기는 ‘오승민 작가 그림책 원화전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를 열어 독자와 작가의 직접적인 접점을 마련했다.
작은 출판사들은 그림책 문화를 건강하게 만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제1회 김은미 그림책상 공모는 이야기꽃과 온다프레스라는 두 곳의 작은 출판사가 함께 준비한 것이다. 작고 낮은 존재들을 비추어온 그림책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콘텐츠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그렇게 활동하는 작가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상이다.
큰 출판사들은 마케팅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교사 및 사서와의 접점을 넓히고 있었다. 웅진주니어는 티테이블 교사/사서 서포터즈를, 문학동네는 교사 서포터즈 ‘뭉끄’를 모집했다.
그림책 전시도 풍성했다.
충청북도교육도서관은 ‘그림책 인형 만나볼래? : 세계의 그림책 캐릭터 인형전’을 열었다. 송파글마루도서관 ‘2024 청룡호 기차가 출발합니다 : 정호선 그림책 전시’를 열었고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그림책 향유자인 어린이들에게 현대미술의 핵심적 의미들을 보여주는 ‘곰곰이와 찬찬이’ 전시를, 알부스갤러리는 ‘아주 커다란 휴식 : 서수연 개인전’을 열었다. 향출판사는 ‘워크숍 28, 29기 2024 겨울전’(2024년 1월 19일~28일)을 개최해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밖에 국내 작가는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거의 날마다 독자를 만나고 있으며 해외 작가들도 종종 내한한다. 그림책이 공연과 만나는 경향은 특히 가족 뮤지컬 분야에서 활발하다.
그림책 관련 전문적인 강좌도 여러 건 있었다.
‘거장들과 함께 걷는 그림책 해석의 길 : 김난령 연구가·번역가와 함께’, 그림책부트캠프가 연 ‘아름다운 종이 그림책의 비밀 :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한국 그림책 8선’, 서울시립대 평생교육원의 ‘그림책 시각과 표현 읽기’ 등 다양하다. 그림책 아카데미는 곳곳에서 1월부터 다양한 강좌를 열었다.
수많은 작은 강좌들도 있다.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를 위한 기본 상식, 그림책 기획 입문, 그림책 글쓰기 워크숍, 그림책 글작가 입문반, 그림책 심리지도사 양성과정, 아이패드로 나만의 그림책 만들기 등 강좌의 명칭만 수십 종이다. 그림책 테라피와 큐레이션 관련 강좌도 많아서 기초 그림책 테라피스트 양성과정이나 그림책 큐레이터 자격증 과정도 수강자를 모집했다. 그림책 인형 만들기 강좌도 지역 도서관을 중심으로 꾸준히 열리고 있다. 양육자를 위한 그림책 페어런팅 리딩클럽이나 그림책 활동가 코칭, 그림책 뇌 운동 프로젝트까지 있다. 그 밖에 온라인에서만 펼쳐지는 부분은 규모와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회원제 카페나 밴드에서만 내용을 공유하는 형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각종 그림책 향유 방식이 공유되고 있음에도 그림책의 판매량이 터무니없이 적고, 그나마도 감소 추세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과 더불어 정확한 대책과 진단이 필요하다.
그림책의 해를 준비하며
2025년은 그림책의 해다. 이 부분에 대한 준비는 현재로서 언급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그림책 정책이 마련되어야만 그림책의 해도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2025년이 정확한 분석과 실천의 의지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그림책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원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림책 문화는 수많은 시민들과 작가, 출판인들의 열정과 공통의 역사를 통해 만들어지는 생물과도 같은 것임을 정책 담당자들이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생물은 살아있을 수 있도록 절실하게 돕지 않으면 죽는다.
대충 살리는 방법은 없다.
이것은 그림책 문화도 마찬가지다.
김지은_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 2025-01-01 09:00
<행복한 아침독서> 2025년 1월호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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