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의 감옥
게티이미지뱅크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다”는 내가 가장 많이 쓰는 글자는 아니라도, 입으로 말한 횟수 대비 글로 적은 횟수의 비율은 아마 가장 높을 듯하다.
방금도 “다”라고 쓰고 마침표를 찍었고 또 지금 그걸 반복하고 있“다.”
우리 글의 종결어미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오래 쓰다 보니 전에 없던 쇠창살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도 하다.
아, 이곳은 그동안 쓴 “다”가 쌓여 만들어진 감옥인가?
아닌 게 아니라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역)에서 이런 종결어미(그쪽도 “~다”이다)를 사용하는 방식을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이자, “확립되자마자 그 기원이 망각되는 장치”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 “~다”체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게,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란 뜻인가?
그렇다.
우리에겐 오랜 세월 한문이 있지 않았나.
권보드래는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에서 “~다”체는 1910년대 말 소설에서 자리를 잡고 십여년 후 일반적 문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권보드래가 전하는 당시 김동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다”체를 쓴 것은 ‘구어체’를 쓰려는 시도였다고 하는데,
사실 “~다”가 우리말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았다고 하니 문어를 구어에 일치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면 뭔가 어긋난다.
오히려 김동인이 초기에 모든 작품을 일본어로 구상한 뒤 우리말로 쓰려다 막힌 부분에서 일본어 언문일치의 핵심인 “~다”의 도입 경로를 상상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인다.
김동인이 시도한 “~다”는 처음에는 아마 일본어 ‘번역투’의 느낌이 났을 듯하다.
가라타니의 말에 따르면
일본어의 경우 “~다”의 기원이 19세기 말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투르게네프 번역이라니, 양쪽 모두에서 “~다”체의 출발은 생경한(또는 참신한) 번역투였던 셈이다.
자연스러운 입말과 어긋난다는 번역투가 언문일치의 말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권보드래의 말에 따르면,
언문일치의 핵심이 무엇보다 “문장 언어의 공통된 규범”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구어도 닮지 않은 인공의 언어”인 “~다”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장점이 있었다.
“~다”는 자주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하대하는 말투 느낌을 털어내고
“무색투명한 문체”,
“자기 자신을 향한 독백을 만인 앞에서 읊조”리는 언문일치의 문체가 될 수 있었다.
가라타니라면 “~다”체가 근대인의 내면을 표현하여 새로운 언=문을 확립하고 기원을 지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다”체가 자리를 잡으면서 과거 종결어미만으로 주어가 짐작되었던 때와는 달리 주어를 밝힐 필요가 자주 생겨, 나/그/그녀 등 대명사에 무게가 실리고 또 “~ㅆ다”라는 과거형이 도입되면서(이 또한 “인공의 언어”라니!) 시간을 현실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은 우리말이나 일본어나 비슷하다(당연한가?).
즉 투르게네프식 리얼리즘 소설에서처럼
‘삼인칭 객관묘사’를 할 수 있는, 그림에 빗대 말하자면 관찰자의 시점에서 원근법으로 대상을 실물처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공의 언어라지만 우리에게는 “~다”와 입말의 간격이 너무 큰 느낌이다.
그래서 이희재는 <번역의 탄생>에서
이런 “거북함”을 언급하며 “다른 방식의 언문일치체를 모색”하는 과제를 말한다.
이 문제 말고도 ‘삼인칭 객관묘사’에 적합한 “~다” 중심 문체가
현재 얼마나 유효한가 하는 큰 문제가 있다.
실제로 “~다”가 감옥이라고 느끼는 번역자는 후타바테이의 고민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다만 후타바테이가 사실주의 원근법 그림 앞에서 고민했다면 지금은 예컨대 입체파 그림 앞에서 고민할 뿐이다. 또 자신의 언이 문과 사이가 틀어졌다고 판단하는 예민한 작가들도 이미 새로운 언문일치를 일상적으로 시도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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