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읽다

[홍은전 칼럼]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닭털주 2022. 3. 16. 12:55

[홍은전 칼럼]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생각보다 더 심란했다.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다 곳곳에 걸린 펼침막 때문에 몇번이나 눈을 질끈 감았다.

페미니스트인 친구는 현실이 눈 뜨고 보기 괴로우니 판타지나 픽션의 세계로 도피하라고 조언했다.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라고.

그래서 나는 김정하를 생각했다. 저항하는 인간들을 기록하는 게 내 일이다.

그들은 모두 복잡하고 미묘해서 고유하게 아름답지만, 그중에 김정하는 단연 독보적인 데가 있다. 무언가 아주 전형적인데 그래서 몹시 희귀하달까.

열일곱살의 정하는 모임을 무려 네개나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중 하나는 장애인시설에 봉사하러 가는 비밀 동아리였다.

그 시설은 정하가 중학생 때부터 교회 사람들과 가던 곳이었는데 담당하던 선생님이 그만두면서 갑자기 방문이 중단되자, 정하가 몰래 친구들을 모아 간 게 시작이었다. 마지막 헤어질 때 다음에 또 올게요했기 때문에 안 갈 수가 없었다고 마흔일곱의 정하가 말했다. 비밀 동아리였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모임 공지는 쪽지를 통해 손에서 손으로 전달했고 회합은 늦은 밤 학교 옥탑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했다.

그게 왜 비밀이었냐고 물었더니 정하가 좀 망설이면서 성경에 보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되어 있거든, 하고 대답했다.

나는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녀 김정하의 너무나 성경적이고 교과서적인 멋있음에는 어떤 기가 막힌 답답함이 있었고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선생님들은 키 크고 힘센 정하에게 운동선수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는 자라서 작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장애인권 운동가가 되었다. 여전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느라 남들보다 곱절은 고단하게 살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아우라가 그에게 있다는 걸 정하 자신만 몰랐다.

2006년 여름, 정하가 서른 즈음이었을 때다.

○○재단이라는 대형 복지법인에서 문제가 터졌다.

정신장애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했고 발달장애인이 묶인 채 맞아 죽었다.

노동 능력이 있는 장애인은 막사에서 먹고 자며 개돼지를 키우는 동안, 운영자 일가는 수십억원을 챙겨 부자가 되었다. 정하와 동료들은 관리 감독의 권한을 가진 종로구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구청은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다가, 어느 날 흰 와이셔츠를 입은 공무원 수십명이 들이닥쳐 천막을 부수기 시작했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장애활동가는 공무원의 구둣발에 그만 목이 짓밟히고 말았다.

그때 우레 같은 목소리로 등판한 정하가 말끔하게 정장을 입고 도열한 공무원들을 향해 힘센 복지 재벌은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힘없는 장애인들은 다 끌어내는 이 치사한 공무원들!” 하며 사자후를 토했다. 정하는 빗물이 줄줄 흐르는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선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야성적 여자와 저 문명적 남자들의 대비가 너무 뚜렷해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정하는 꼭 총을 든 인간들과 대치 중인 한 마리의 슬픈 동물처럼 보였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완벽하게 무력한 자리에 있는 그가 실은 가장 힘센 존재임을 알았고 경외감을 느꼈다. 역사는 도도하게 흐른다는 걸 잊지 않고 싶을 때 나는 그날의 정하를 떠올린다.

2018년 정하는 대형 장애인시설을 운영하는 프리웰재단의 이사장이 되었다.

권력과 싸우던 사람이 그 권력에 앉는 이야기엔 필연적인 위태로움이 있다.

그 자리에선 누구나 높은 확률로 사회적 합의나중에같은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하는 그런 우려에 선을 긋듯 부임하자마자 모든 거주인의 안전하고 빠른 탈시설과 시설 폐지를 선언했고, 정말로 3년 뒤 그렇게 되었다. 나는 장애운동을 하면서 놀라운 변화를 많이 보았지만 이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드라마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뒤엔 탈시설화에 반대하는 시설운영자, 노동자, 거주인 가족들의 맹공격이 있었고 정하는 자신을 향한 온갖 고소 고발에 대응하느라 몹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정하에게 이 힘든 일을 왜 계속하느냐고 물었다.

콧줄 끼고 누워서 생활하던 분이 계셨어. 그분이 탈시설 하신 뒤에 찍은 사진을 봤거든. 야간 개장한 경복궁이었는데.”

역류성 식도염이 도졌다며 정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말했다.

웃고 계셨어. 시설에 살 땐 표정이 없는 분이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모르는 희미한 아름다움을 정하는 아주 많이 알 것이다. 그 말을 할 때 정하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 잘 아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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