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23

한소끔 [말글살이]

한소끔 [말글살이]수정 2025-03-07 07:26 등록 2025-03-06 14:30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 못했다. 가난뱅이 손에 쥐어진 식재료가 마르고 앙상한 것밖에 없어서였겠지만, 그걸 입에 맞게 탈바꿈시키는 재주가 엄마에게는 없었다. 싼 물엿으로 조린 멸치볶음은 늘 딱딱하게 한 덩어리로 굳어 있어서 씹을 때마다 입천장을 찔렀다. 김치는 짜고 질겼고, ‘짠지’는 짰지만 물컹했다. 철 지난 자반고등어는 가시만 많고 살은 적어 성마른 젓가락질을 하다 보면 목에 가시가 자주 걸렸다. 소풍날 김밥은 진밥 때문인지 싸구려 김 때문인지 늘 터져 있었다. 특히 엄마가 잘 못 만드는 음식은 시금치나물이었다. 봄철 별미인 시금치나물은 시금치를 적당히 데치는 게 관건이다. 한소끔 끓어오를 때 불을 끄고 바로 건..

연재칼럼 2025.03.08

반대말 [말글살이]

반대말 [말글살이]수정 2025-02-13 19:02 등록 2025-02-13 14:30  클립아트코리아  멀리서 시인이 왔다. ‘반대말이 없는 말’을 찾고 있다고 한다. 아예 반대말이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반대말이 없는 말이 훨씬 많다. 하지만 반대말로 묶인 낱말들이 서로 끈적하게 붙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말은 욕조에 머리와 발만 내밀고 있는 것처럼 가운데보다는 양극단에 이끌리는 인간 본성을 반영한다. 남자와 여자, 살다와 죽다, 아들과 딸, 오른쪽과 왼쪽, 크다와 작다, 춥다와 덥다. 두 낱말만 합하면 마치 전체를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와 여자를 합하면 사람 전체를, 살다와 죽다를 합하면 인생 전체를, 아들과 딸을 합하면 자식 전체를 말한다는 느낌! 둘로 쪼개니 기억하기도 쉽다. 다음..

연재칼럼 2025.02.15

마침표 [말글살이]

마침표 [말글살이] 수정 2025-01-30 18:44 등록 2025-01-30 14:35  독립신문 창간호  마침표를 쓰기 시작한 건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 글은 ‘쓰지만’ 마침표는 ‘찍는다’ 문장이 끝났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단호하게 찍으라 문장에 하듯이 어떤 일이든 종지부를 찍으면 끝맺음이 되고 홀가분해지겠지 이 글처럼 마침표 없는 글은 불안하다 하지만 한국어처럼 말꼬리가 발달한 언어는 마침표 없이도 ‘얼추’ 어디쯤에서 말이 끝나는지 알 수 있다 옛글에는 마침표가 아예 없었다 고소설 ‘장끼전’만 봐도 장끼가 땅바닥에 있는 콩 한 알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어화 그 콩 소담하다 하늘이 주신 복을 내 어이 마다하리 내 복이니 먹어 보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한글 전용을 하고..

연재칼럼 2025.02.01

‘-음’ [말글살이]

‘-음’ [말글살이]수정 2024-11-28 18:48 등록 2024-11-28 14:30  기계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다. 괘종시계를 분해하여 안을 들여다보면 에너지를 만드는 태엽, 에너지를 전달하는 톱니바퀴, 에너지를 규칙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만드는 탈진기 등의 부품이 있다. 말도 시계처럼 부품들로 분해할 수 있다. 사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명사’와 사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가 대표적이다. 명사와 동사를 조립하면 하나의 사건을 표현할 수 있다. ‘자동차가 달린다’, ‘사람을 만났다’, ‘밥을 먹었다’. 그런데 동사에 ‘-음’이라는 도깨비방망이를 붙이면 명사로도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다. ‘움직임’은 시간이 지나면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건만, 마치 형체..

연재칼럼 2024.11.30

‘말하지 않기’, 세상을 바꾼다 [말글살이]

‘말하지 않기’, 세상을 바꾼다 [말글살이]수정 2024-11-14 18:42 등록 2024-11-14 14:30  인간은 집요하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까지 생각해내어 거기에 악착같이 의미를 부여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끌어올린 힘일지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유함으로써 인간 문명은 봄철 개나리꽃 피듯이 만개했다.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억만배는 더 많다. 공룡, 도깨비같이 잘 알려진 것 말고도 많다. 쓰지 않은 편지, 만들지 않은 음식, 그리지 않은 그림, 준비하지 않은 선물, 필름 없이 찍은 사진…. 그러한 것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

연재칼럼 2024.11.15

‘감히’ 외쳐본다 [말글살이]

‘감히’ 외쳐본다 [말글살이]수정 2024-10-31 18:55 등록 2024-10-31 14:30  ‘감히’에 쓰인 ‘감’은 한자로 ‘敢’이다. 중국 갑골문에 새겨진 그림글자를 보면 사람이 맹수의 꼬리를 손으로 잡는 모습을 본떴다. 호랑이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꼬리를 덥석 잡을 수 있을까? 아서라, 배가 부른 맹수라도 아량을 베풀지 않으리. ‘감히’는 누구를 향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의미로 나뉜다. ‘어디서 감히’ ‘감히 뉘 앞이라고’에서처럼 상대방을 향해 쓰면 말이나 행동이 건방지고 주제넘고 ‘선을 넘었음’을 지적하는 말이 된다. 이 말을 쓰는 순간,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얼굴은 굳어진다. 좁혀질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멀어지면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는다. ‘감히’라는 말은 신분제 사회 질서가 ..

연재칼럼 2024.11.02

체념의 힘

체념의 힘입력 : 2024.10.22 20:58 수정 : 2024.10.22. 21:02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의사이자 문화인류학자인 김관욱은 최근작 몸,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에서 인간의 몸이 발명해낸 질환으로 체념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을 소개한다. 이 증상은 몸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극복하려 하기보다 고통을 감수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증상 중 하나가 수면인데, 무려 5년 동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깨어날까. 죽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아니, 수면이 유일한 자기 보호 조치라면 깨어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한 무리의 소녀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흔들고 꼬집는 ..

연재칼럼 2024.10.23

문해력도 모르는 닭대가리 [말글살이]

문해력도 모르는 닭대가리 [말글살이]수정 2024-10-10 19:02 등록 2024-10-10 14:30  강의실을 묘사하라 했더니, 학생 최다희씨는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구옥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낡은 건물’ 정도면 됐을 텐데, 이십대 젊은이가 ‘구옥’이라는 희귀한 말을 쓰다니(“‘구석’을 잘못 쓴 건가, 아니면 ‘9억’을?”이라 하는 친구도 있겠지만). 교과서에 나올 것 같지도 않은 이 낱말을 어떻게 쓰게 된 걸까? 책을 읽다가, 아니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음에 새겨진 거겠지. 한글날이면 늘 등장하는 두가지 주제. 하나는 외국어가 남용되고 신조어가 넘쳐나 소통이 어렵다는 것. 총리가 ‘외국어 새말 대체어 사업’을 추진한단다. 국가가 말과 글을 잡도리하겠다는 생각은 고쳐지지 않는다..

연재칼럼 2024.10.20

‘무례하다’는 생각의 질서 [말글살이

‘무례하다’는 생각의 질서 [말글살이]수정 2024-10-17 18:48 등록 2024-10-17 14:30  게티이미지뱅크  전화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무례하다! 처음 전화를 걸면 자신이 누군지 밝혀야 한다는 걸 당최 모른다. 몇달 만에 연구실 전화벨이 울린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떤 젊은 녀석(!)의 얘기인즉슨, 학회에 논문을 투고하려고 하는데 인터넷에 문제가 생겼으니 편집간사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것이다.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데 전화 거신 분은 누구신가요?” 그제야 깜짝 놀라며 어느 대학 대학원생 누구라고 말한다.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할 말만 다다닥 하는 전화를 받으면 부아가 치민다. 무례한 친구군! 그런데 문득, 무례하다는 ..

연재칼럼 2024.10.20

자외선과 적외선 [말글살이]

자외선과 적외선 [말글살이]수정 2024-10-03 18:41 등록 2024-10-03 14:30  인간은 고집쟁이. 과학적 지식을 아무리 쌓아도 세상살이에서 얻은 감각과 기억은 좀처럼 버리지 못한다. 이를테면, 색깔은 물체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사과가 빨간 것은 껍질이 본래 빨갛기 때문이고, 나뭇잎이 초록인 건 원래 초록빛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색깔은 빛과 사물, 그리고 그걸 보는 인간의 감각기관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칠흑같이 어두운데도 물체가 보인다면, 그곳에 조금이나마 빛이 있기 때문이다. 깜깜밤중에 고양이 눈이 야광 불빛처럼 보이는 것도 자체 발광이 아니라, 고양이 눈에 들어간 빛을 망막에서 반사하기 때문이다. 내 감각 너머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 때, 이 세계는 더욱 경..

연재칼럼 2024.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