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눈코 뜰 새 없다’니…얼마나 바쁘면 말도 부실하다

‘눈코 뜰 새 없다’니…얼마나 바쁘면 말도 부실하다수정 2024-06-06 18:44 등록 2024-06-06 14:30  바쁘면, 돌아보고 둘러보고 넓게 보고 멀리 볼 수 없다. 그저 여기저기에 매달려 살 뿐. 요즘 내가 딱 그 짝이다. 여유 있게 굽은 골목길로 발을 들여놓지도,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처량하게 쳐다보지도, 사람을 정성껏 대하지도 못한다. 할 일의 가짓수는 늘어 가는데, 머리는 더디고 손은 느리고 몸은 굼뜨다. 바쁘다 보니, 만나자는 연락에 ‘눈코 뜰 새 없다’며 거절하기 일쑤. 이 표현과 같은 뜻의 ‘안비막개’(眼鼻莫開, 눈과 코를 뜰 수 없다)라는 한자어도 있는 걸 보면, 옛사람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바쁘면, 말도 부실하다. 국수에는 젓가락이, 팥죽에는 숟가락이..

연재칼럼 2024.06.11

거짓말의 추억 [말글살이]

거짓말의 추억 [말글살이]수정 2024-05-02 18:44 등록 2024-05-02 14:30  나는 거짓말쟁이다. 선생이란 직업이 주는 허명에 속아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로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헛짚었다. 밤낮없는 거짓말! ‘사실과 다르게 꾸민 말’이라고 하지만, 먹물들의 거짓말은 성격이 다르다. 보통의 거짓말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벌어진 일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 걸 했다고 한다. 진위가 가려지면 비난과 처벌을 받거나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화끈하다. 물건을 훔치고도 안 훔쳤다고 말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비리를 저지르고도 그러지 않았다고 우기는 사람은 법적 처벌과 사회적 몰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러는 걸 테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은 얄궂다. 남들은 모르..

연재칼럼 2024.05.04

‘기타’를 업신여기지 말라 [말글살이]

‘기타’를 업신여기지 말라 [말글살이] 수정 2024-04-04 18:41 등록 2024-04-04 14:30 내 방은 왜 이리 어지러운 건가? 오늘도 책 한 권을 찾느라 반나절을 보냈다. 남들은 정리정돈을 잘만 하던데, 내 방은 책 위에 책이, 책 뒤에 책이, 층층이, 칸칸이,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언젠가 읽겠다며 사 모은 철학, 교육, 사회, 예술, 문학책들이 전공책들과 함께 뒤엉켜 있다. 거기에 지난주 회의 자료와 주전부리, 세 갈래로 쪼개진 거울, 탑이 된 과제물들, 수북이 쌓인 볼펜과 우산 몇 자루, 낡은 온풍기,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들. (‘기타’ 잡동사니가 ‘나’의 습성을 말해준다.) 이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분류하고 모두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삼라만상을 어찌 인간적 기준으로 완벽..

연재칼럼 2024.04.05

여성 공천 할당제를 생각한다

여성 공천 할당제를 생각한다 입력 : 2024.04.02 20:25 수정 : 2024.04.02. 20:31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모든 피의자는 공평하게 법률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전두환씨, 아동 성폭력 가해자, 연쇄살인범도 예외가 아니다. 최종 판결까지는 무죄로 간주한다는 원리 역시 분명한 정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서울시 강북을 공천 논란의 주인공인 조수진 변호사 수임 경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변호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한국미래변호사회가 밝힌 변호사의 성폭력 피의자 변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입장에 동의한다. 한미변은 “변호사 출신 후보가 특정 사건을 수임했다는 이유로 과도한 사회적 비난을 받는 현실에 강한 ..

연재칼럼 2024.04.03

최댓값과 최솟값

최댓값과 최솟값 수정 2024-03-28 18:48등록 2024-03-28 14:30 이차함수. 본 적이 있으실지? ‘ax²+bx+c’. 그래프로 그릴 수도 있는데, x² 앞에 오는 a가 양수냐, 음수냐에 따라 모양이 정반대로 바뀐다. 예컨대, a가 양수인 y=2x²+3x+1이라는 함수의 x 자리에 숫자를 하나씩 넣어보자. x가 -2면 y=3, x가 -1이면 y=0, x가 0이면 y=1, x가 1이면 y=6, x가 2이면 y=15. 이런 식으로 x의 변화에 따라 y의 값을 구하고, 이를 그래프에 하나씩 점을 찍고 이으면 ‘∪’ 모양의 오목한 포물선이 나온다. 이때엔 포물선의 맨 끝 바닥에 있는 최솟값만 구할 수 있다. 양쪽은 위로 무한히 뻗어나가니 최댓값은 구할 수 없다. 반면에 y=-2x²+3x+1처럼..

연재칼럼 2024.03.29

‘그냥 부자’의 두 의미,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말글살이]

‘그냥 부자’의 두 의미,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말글살이] 수정 2024-03-07 18:45 등록 2024-03-07 14:30 영화 ‘파묘’. 쇼박스 제공 영화 ‘파묘’에 나온 ‘그냥 부자’란 말이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냥’은 철학적 무게가 느껴지는 부사이다.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뭉뚱그려 말해 ‘그냥’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냥 있지 뭐.” “이거 저쪽으로 옮길까?” “아니, 그냥 그 자리에 둬.” 변함없이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무 이유나 조건 없이’라는 뜻이 있다. “어쩐 일로 연락을 했어?” “그냥.” “왜 날 좋아해?” “그냥 좋아.” “그 일을 왜 하는가?” “그냥 한다오.” 복잡한 계산 없이 ..

연재칼럼 2024.03.11

저출산은 해결되지 않는다

저출산은 해결되지 않는다 입력 : 2024.03.05 20:05 수정 : 2024.03.05. 20:09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작년 한국의 출생아 숫자는 23만명이다. 그중 4분기 합계출산율이 사상 처음으로 0.6명대를 기록했다. 0.5명대도 가능하다고 본다. 언제부터인가 저출산 관련 뉴스를 접하지 않는 날이 없다. 어딜 가도 “저출산, 저출산…”이다. 최근에는 ‘저출산’이 문제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로 ‘저출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인식에 반대한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저출산은 여성의 진화생물학적 적응이자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마리아 델라 코스타의 용어대로 “파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은 시민의 정..

연재칼럼 2024.03.06

동태눈 [말글살이]

동태눈 [말글살이] 수정 2024-02-29 18:42 등록 2024-02-29 14:30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속설을 잘 믿지 않는다. ‘눈이 크면 겁이 많다’고? 보이는 게 많아 주변 눈치를 살펴야 해서 그렇다나 어쨌다나. 하지만 나는 눈이 단춧구멍보다 작은데도 겁이 겁나게 많다. 나는 속설을 잘 믿는다. ‘눈은 마음의 창’! 눈에 마음이 담기고 드러나니 저런 얘기가 나왔겠지. 그래서 거울 속 내 눈을 본다. 동태눈. 눈동자는 선명하지 않고 흰자위는 탁한데다가 군데군데 실핏줄이 터졌고 회백색 멍울이 박혀 있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이 탁해 동태눈이 되었는가, 동태눈이라 마음도 이리 탁한가 묻는다. 그래도 ‘동태눈’이란 말은 정겹다. 명태를 말리지도 않고 얼린, 동태라니. 그 눈을 닮았다니. 한국..

연재칼럼 2024.03.02

‘끌어내다’ 그 말을 즐기는 자는… [말글살이]

‘끌어내다’ 그 말을 즐기는 자는… [말글살이] 수정 2024-02-22 18:43등록 2024-02-22 14:30 다리를 다치면 목발을 짚듯이, 말도 뜻이 불분명하면 필요 없는 말을 덧대어 뜻을 선명하게 만든다. 단어 ‘드나들다’를 보면 ‘들다’와 ‘나다’가 합쳐져 ‘드나(들나)’가 만들어졌지만, 뜻이 불분명하여 뒤에 ‘들다’를 한번 더 썼다(‘나들이’는 한번씩만 썼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 말에서 보듯이, 경계 밖으로 나가는 걸 ‘나다’, 안으로 들어오는 걸 ‘들다’라고 한다. 하지만 두 단어는 다른 뜻도 많아서 안이나 밖으로 움직인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려면 ‘나오다, 나가다, 들어오다, 들어가다’처럼 뒤에 ‘오다, 가다’를 붙여줘야 한다 (요즘엔 ‘안으로 들라!’보다 ‘..

연재칼럼 2024.02.23

‘~라면’…해탈을 가로막는 그 상상들 [말글살이]

‘~라면’…해탈을 가로막는 그 상상들 [말글살이] 수정 2024-02-15 18:41 등록 2024-02-15 14:30 게티이미지뱅크 망할 놈의 상상.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만이 아니라, 빠듯한 현실에 허덕거리며 사는 사람도 틈만 나면 상상을 한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지금 이 순간에 머물라고 하던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상상은 해탈을 가로막는 마귀. 그 마귀가 낳은 아들은 번민.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얌전히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도 함께 떠올린다. 마치 이미 벌어진 일이 벌어지지 않은 일들까지 모두 데리고 다니는 것 같다.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표현하는 언어적 장치가 가정문(조건문)이다. 대표적으로 ‘만약 ~라면’. ..

연재칼럼 2024.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