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술 고프다”…‘고프다’의 배신? ‘배’의 가출? [말글살이]

“술 고프다”…‘고프다’의 배신? ‘배’의 가출? [말글살이] 수정 2024-02-08 15:38 등록 2024-02-01 14:30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농담 투로 말하면, 나는 ‘과학자’다(말하고 나니 정말, 가소롭군). 과학자로서 품은 욕심 중 하나는 말뜻이 어디로 튕겨나갈지를 예측하는 것. ‘한치 앞’을 알고 싶어 한달까. 하지만 매번 실패다. 한치 앞의 사람 일도 알 수 없는데, 말의 한치 앞을 알 턱이 없지. 방금까지 좋아 죽던 사람이 세치 혀를 잘못 놀려 일순간 원수가 되듯이, 낱말은 자신이 밟을 경로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순간 변해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알아차릴 뿐이다. ‘고프다’가 대표적이다. ‘배 속이 비어 음식이 먹고 싶다’는 뜻의 이 낱말은..

연재칼럼 2024.02.13

사이시옷…원칙은 현실을 망각하는 일이 잦다 [말글살이]

사이시옷…원칙은 현실을 망각하는 일이 잦다 [말글살이] 수정 2024-01-25 19:55 등록 2024-01-25 14:31 클립아트코리아 당신은 원칙주의자인가? 재미있게도 ‘근본주의자, 급진, 과격파’를 뜻하는 영어 ‘래디컬’(radical)의 어원은 ‘뿌리’(root)이다. 뿌리는 땅에 굳건히 박혀 있으니 뒤집어엎지 않고는 바꾸기 어렵다. 한국어학계에서 근본주의적 태도를 우직하게 지키는 곳이 한글학회이다. 한글학회에서 낸 ‘우리말큰사전’이 대중들로부터 멀어진 이유 중 하나는 사이시옷(ㅅ)을 적는 방법의 차이 때문이었다. 문교부 고시 ‘한글 맞춤법’에는 고유어가 들어간 명사들이 합쳐져 새 단어가 될 때, 발음이 달라지는 걸 어떻게 표시할까 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 ‘바다’와 ‘가’를 합쳐 [바다가]라..

연재칼럼 2024.01.26

이제 다신 못 보낼 ‘전보’…마지막 한 통 보내볼까 [말글살이]

이제 다신 못 보낼 ‘전보’…마지막 한 통 보내볼까 [말글살이] 수정 2024-01-12 15:06 등록 2024-01-11 14:30 138년 동안 유지되던 전보 서비스는 지난 12월15일 공식 종료되었지만, 설 연휴가 포함된 오는 2월까지 한시적으로 연장한다. 연합뉴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지난달 서울 사는 준하는 할머니께 전보를 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번 생신 때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이렇게 전보로 마음을 남깁니다. 할머니께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할머니께 업혀 놀던 기억이 아직까지 새록새록 합니다. 저는 할머니의 인생 중 2할도 못 채울 만큼 어리지만 지금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중략) 생신 축하드립니다. 너무 늦게 연락드려 죄송해요.”..

연재칼럼 2024.01.13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도둑맞은 미감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도둑맞은 미감 수정 2024-01-11 02:00 등록 2024-01-10 14:27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 한 장면. 은행을 털려다 엉뚱하게 쿠키를 팔아 졸부가 된 부부는 상류층의 멋과 미감까지 사려고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될 리 없다. 이명석 | 문화비평가 누군가를 기죽일 때 쓰기 좋은 말이 있다. “너 좀 구린 거 알아?” 미팅 때 옷차림, 동호회 파티에서 튼 음악,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 등 마음을 후벼 팔 기회는 많다. “너 멍청해!”라면 어떻게든 영민함을 발휘해 회복할 텐데, 아름다움이란 점수로 측정 안 되고 주관에 좌우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핀잔을 들어도 극복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 새해를 맞아 그림, 공예, 연주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푸념한다..

연재칼럼 2024.01.11

[김용석의 언어탐방] 템포: 속도의 다양한 스펙트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템포: 속도의 다양한 스펙트럼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빠름과 느림이라는 삶의 과제는 실존적 담론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사반세기 전 정보기술(IT)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화가 가져온 것은 개별 기술의 속도보다도 우리 삶 전체에 몰고 온 변화의 속도였다. 급속한 ‘변화를 앞세운 시대’가 본격 개막되었던 것이다. 인공지능(AI) 기술로 대표되는 오늘날 이런 시대적 특징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수정 2024-01-09 20:02등록 2024-01-09 19:14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슛! 골! 손흥민 선수가 멋지게 감아 찬 공이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오프사이드로 취소되었다. 다음 골도 그랬다. 중계를 보는 사람도 열받는데, 그는 시합 후에 차분히 말했다...

연재칼럼 2024.01.09

인간의 조건, 국민의 조건

인간의 조건, 국민의 조건 입력 : 2023.12.26. 20:10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편집장 이 글은 사회학자 오찬호의 글 “여자도 군대 갔다면, 달라졌을까”(경향신문, 2023년 12월18일자)에 대한 부연이다. 나는 그의 글을 금태섭 전 의원과 류호정 의원의 신당 추진 과정에서 나온 “여성 징병제 vs 남성 돌봄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읽었다. 정책 영역뿐 아니라 “국가를 위해 남성은 군대에 가고 여성은 출산한다”는 통념은 막강하다. 일상에서도 마치 자연의 이치인 양 회자되고, 징병제 문제가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다. 물론 이는 어불성설이다. 실현되어야 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일단, 돌봄과 병역은 어느 성별이 수행하는가를 떠나, 자명한 인간사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인간이 만..

연재칼럼 2024.01.07

온전한 한국어

말글살이 온전한 한국어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려 2년 전부터였다. 주변 지인들에게 말로만 다짐을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연구 주제가 있다. 안산, 시흥, 포천, 화성, 안성, 거제, 아산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이 사는 도시에서 한국어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관찰하는 거였다. 특히 인구 대비 이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충북 음성(16%)을 비롯하여, 경기 안산(14%), 전남 영암(14%)에 가 보고 싶었다. 중국, 베트남, 타이,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에서 온 이주민이 선술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려면 어쩔 수 없이 한국어를 써야 할 텐데, 그때의 한국어는 어떤 모습일까. 이들 이주민들과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국인의 한국어는 어떤 굴곡을 겪고 있을지도 ..

연재칼럼 2024.01.06

[말글살이] 여보세요?

[말글살이] 여보세요?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휴대전화는 예전엔 안 하던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유선전화는 누구 전화인지 알고 싶으면 무조건 받아야 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액정화면에 ‘아는 사람’과 ‘모르는 번호’를 또렷이 구분해 보여준다. 모르는 번호면, 모르는 사람일 텐데…. 받을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대부분 보험 가입을 권하는 광고전화. 목화솜이불을 닮은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해 계속 들어주다 미안함만 쌓인다. 그렇긴 하지만,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가 광고전화라는 걸 언제 아는가? 생각보다 빠르다. 딱 첫마디! 두번째도 아닌 첫번째.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지. 광고전화는 “여보세요?”라는 말에 “반갑습니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 고객님 맞으신가..

연재칼럼 2023.12.29

[말글살이] 맛을 보다

[말글살이] 맛을 보다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인간은 몇가지 감각기관으로 이 세계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오감으로 불리는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 형태, 소리, 냄새, 맛, 촉감을 알아차린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혀로 핥고, 몸으로 느낀다. 잠깐만 생각해 봐도, 오감 중 어느 하나만으로 존재를 알아차리는 경우는 드물다. 여러 감각을 동시에 동원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눈으로 보지만,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이 문을 열며 내는 소리를 듣고, 그가 몰고 온 향취를 맡고, 옅은 바람의 진동도 함께 느낀다. 그런데도 인간의 말은 단순하다. 말은 감각을 선택적으로 표현한다. 여러 감각이 함께 작동하는데도 어느 한 감각만을 대표로 삼아 표현한다...

연재칼럼 2023.12.29

[말글살이] 어떤 반성문

[말글살이] 어떤 반성문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는 게 후회의 연속이다. 말을 해서 후회, 말을 안 해서 후회, 말을 잘못해서 후회. 집에서는 말이 없어 문제, 밖에서는 말이 많아 문제. 나는 천성이 얄팍하여 친한 사람과는 허튼소리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탈이 난다. 며칠 전에도 후배에게 도 넘는 말장난을 치다가 탈이 났다. 아차 싶어 사과했지만, 헤어질 때까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상대방을 살피지 않고, 땅콩 까먹듯이 장난질을 계속하니 사달이 나지. 올해 가장 후회되는 말실수. 지난여름, 어느 교육청 초대로 글쓰기 연수를 했다. 한 교사가 ‘약한 사람들이 할 일은 기억, 연대, 말하기’라고 말한 이유를 물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뻘소리’를 했다...

연재칼럼 202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