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30

내 평생소원, 표준어를 공통어로 바꾸는 것 [말글살이]

내 평생소원, 표준어를 공통어로 바꾸는 것 [말글살이]수정 2025-06-19 18:49 등록 2025-06-19 17:14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네 평생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것이라고 하겠다.(거짓말) 말 공부하는 선생이라는 직업인으로서 평생소원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 내 평생소원은 두가지다. 첫째는 대학의 상대평가를 없애는 것. 대학에 있으면서 뭐든지 들어줄 테니 소원 하나만 말해보라고 하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상대평가를 없애는 것이라고 하리라.(이 소박한 꿈을 이루기가 참 어렵다.) 엊그제 졸업을 앞둔 가연씨가 불쑥 꺼낸 말. “제가 졸업하고 나가더라도 대학이 절대평가로 바뀌면 좋겠어요. 돌이켜보니 옆 친구들과..

연재칼럼 2025.06.19

손톱의 때 [말글살이]

손톱의 때 [말글살이] 수정 2025-06-05 18:49 등록 2025-06-05 17:36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비슷한 말. 발톱의 때. 나의 은사님은 은퇴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기도 가평 율길리로 들어가 포도 농사꾼이 되었다.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다가 해질녘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며 지친 몸을 달랜다. 미끈한 도시 서울에 올 때면 제일 신경 쓰이는 게 손톱에 낀 때. 힘겨운 노동이든 신나는 놀이든, 사람이 땅과 어울렸다는 흔적. 비누칠을 해도 잘 빠지지 않는다. 나도 톱질이든 텃밭 일이든, 뭐라도 작은 일을 할라치면 어김없이 손톱 밑에 때가 낀다. 밥숟가락을 들다가도 슬며시 상 밑으로 손을 내려 파내게 된다. 말에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오래된 생활 방..

연재칼럼 2025.06.06

바닥 신호등 [말글살이]

바닥 신호등 [말글살이]수정 2025-05-22 18:44 등록 2025-05-22 15:47 서울 중구 청구역 앞 스쿨존 횡단보도에 설치된 LED 바닥 신호등에 빨간불(왼쪽 사진)과 초록불(오른쪽 사진)이 들어온 모습. 연합뉴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딸은 장난치듯 챗지피티를 열더니 내 글이 실린 사이트 주소를 대여섯군데 알려주고 ‘이 사람의 글쓰기를 분석해 달라’고 한다. 아양 떠는 답변만 하길래,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고 신랄하게 비판해 보라고 하니, 어머! 글이 ‘미학적 자기기만’이자 ‘책임 회피’라 하더라. 그러면서 ‘자신을 낮추는 듯하면서도 이미 획득한 지식인의 권력을 매끄럽게 유지한다’는 준엄한 판결을 내린다(기계마저 내가 이중인격자임을 알다니). 필요하다면(!..

연재칼럼 2025.05.24

뭔 소리야? [말글살이]

뭔 소리야? [말글살이]수정 2025-05-15 23:26등록 2025-05-15 17:13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소리가 숙제다. 나는 귀가 어두워 뉴스라도 들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볼륨을 서너칸 더 올려야 한다. 난청을 방치하면 치매 위험이 다섯배나 높다고 하던데, 잘 못 들으니 이해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꽝이다. 말귀를 못 알아들어 상대방이 한 말을 되묻곤 하는데 ‘관심과 애정 부족’이라는 항의를 받기 십상이다. ‘종소리, 물소리, 풍경 소리’처럼 물체에서 나는 ‘소리’(음향)는 물리적 현상으로 말 그대로 소리일 뿐이다.(그런 소리에조차 ‘뜻’이나 ‘의도’를 갖다 붙이니 피곤하지.) 사람 입에서 나는 ‘소리’(음성)로 눈을 돌리면 달라진다. 잘 알다시피 말은 소리와 뜻이 합..

연재칼럼 2025.05.17

끝내 [말글살이]

끝내 [말글살이]수정 2025-05-08 18:44 등록 2025-05-08 14:30 ‘내내’는 어떤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이어질 때 쓰는 부사이다. ‘여름에 비가 왔다’는 말은 비가 한번만이라도 내리면 그만이지만, ‘여름 내내 비가 왔다’고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는 뜻이 된다. ‘말 그대로’ 쉼 없이 비가 내렸다면 재앙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말은 태생적으로 ‘뻥튀기’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중에서 눈에 띄는 한두가지를 골라 마치 그게 전부인 양 과장한다. ‘방학 내내 소설책만 읽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적어도 밥은 먹고 잠도 잤을 테니). 여러 일 중에서 소설책 읽는 게 가장 도드라졌다는 뜻이겠거니 한다. ‘..

연재칼럼 2025.05.09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속셈’이 있다 [말글살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속셈’이 있다 [말글살이]수정 2025-05-01 18:39 등록 2025-05-01 14:30 스무살 언저리. 식당에서 밥을 더 얻어먹겠다는 심산으로 잔꾀를 부렸다. 비빔밥을 시키고 일부러 고추장을 반 숟가락 더 넣어 벌겋게 만들었다. 식당 주인에게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어 매워서 그러니 밥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얼마나 잔머리를 굴리며 살아왔을지 안 봐도 알겠지? 연필이나 계산기를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하는 계산을 속셈이라 하는데, 외우는 것이라곤 구구단밖에 없는 나로선 속셈으로 ‘35×72’ 같은 두 자릿수 곱셈은 엄두도 못 낸다. 머릿속 허공에 칠판을 달아 놓고 셈을 해 봐도 ‘35×2’의 값을 금방 까먹어 버리니 도무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숫자로 하는 ..

연재칼럼 2025.05.03

말의 깊이

말의 깊이 [말글살이]수정 2025-04-24 18:43 등록 2025-04-24 14:30 질문과 사람에 따라 답하는 말의 깊이가 달라진다. 게티이미지뱅크 고민이 하나 있다. 옷에 튄 한 방울 김칫국물 자국처럼 내내 신경이 쓰인다. 자질구레하여 말 꺼내기도 남사스러운 고민인즉슨, 누군가 ‘오늘 시간 어떠냐’는 물음에 답하는 말본새를 보고 있노라면 가관이라 그렇다. 시간이 안 나면 ‘약속 있다’ ‘일 있다’ 정도로 답하면 좋으련만 안 되는 이유를 다 말한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를 칠십년 만에 만나기로 했어요”라는 식이다. 혹여 시간이 나면 ‘2시 이후에 괜찮다’고 짧게 답해도 되는데, 굳이 “오전에 수업 마치고 학생들한테 짜장면 얻어먹기로 했으니, 2시 이후에나 봅시다”라 한다. ‘뭐 하러 개인 ..

연재칼럼 2025.04.24

한소끔 [말글살이]

한소끔 [말글살이]수정 2025-03-07 07:26 등록 2025-03-06 14:30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 못했다. 가난뱅이 손에 쥐어진 식재료가 마르고 앙상한 것밖에 없어서였겠지만, 그걸 입에 맞게 탈바꿈시키는 재주가 엄마에게는 없었다. 싼 물엿으로 조린 멸치볶음은 늘 딱딱하게 한 덩어리로 굳어 있어서 씹을 때마다 입천장을 찔렀다. 김치는 짜고 질겼고, ‘짠지’는 짰지만 물컹했다. 철 지난 자반고등어는 가시만 많고 살은 적어 성마른 젓가락질을 하다 보면 목에 가시가 자주 걸렸다. 소풍날 김밥은 진밥 때문인지 싸구려 김 때문인지 늘 터져 있었다. 특히 엄마가 잘 못 만드는 음식은 시금치나물이었다. 봄철 별미인 시금치나물은 시금치를 적당히 데치는 게 관건이다. 한소끔 끓어오를 때 불을 끄고 바로 건..

연재칼럼 2025.03.08

반대말 [말글살이]

반대말 [말글살이]수정 2025-02-13 19:02 등록 2025-02-13 14:30  클립아트코리아  멀리서 시인이 왔다. ‘반대말이 없는 말’을 찾고 있다고 한다. 아예 반대말이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반대말이 없는 말이 훨씬 많다. 하지만 반대말로 묶인 낱말들이 서로 끈적하게 붙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말은 욕조에 머리와 발만 내밀고 있는 것처럼 가운데보다는 양극단에 이끌리는 인간 본성을 반영한다. 남자와 여자, 살다와 죽다, 아들과 딸, 오른쪽과 왼쪽, 크다와 작다, 춥다와 덥다. 두 낱말만 합하면 마치 전체를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와 여자를 합하면 사람 전체를, 살다와 죽다를 합하면 인생 전체를, 아들과 딸을 합하면 자식 전체를 말한다는 느낌! 둘로 쪼개니 기억하기도 쉽다. 다음..

연재칼럼 2025.02.15

마침표 [말글살이]

마침표 [말글살이] 수정 2025-01-30 18:44 등록 2025-01-30 14:35  독립신문 창간호  마침표를 쓰기 시작한 건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 글은 ‘쓰지만’ 마침표는 ‘찍는다’ 문장이 끝났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단호하게 찍으라 문장에 하듯이 어떤 일이든 종지부를 찍으면 끝맺음이 되고 홀가분해지겠지 이 글처럼 마침표 없는 글은 불안하다 하지만 한국어처럼 말꼬리가 발달한 언어는 마침표 없이도 ‘얼추’ 어디쯤에서 말이 끝나는지 알 수 있다 옛글에는 마침표가 아예 없었다 고소설 ‘장끼전’만 봐도 장끼가 땅바닥에 있는 콩 한 알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어화 그 콩 소담하다 하늘이 주신 복을 내 어이 마다하리 내 복이니 먹어 보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한글 전용을 하고..

연재칼럼 202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