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42

두고 보자 [말글살이]

두고 보자 [말글살이] 수정 2025-09-04 18:39 등록 2025-09-04 16:56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곧바로 맞서지 못하면서도 분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아 복수를 다짐하며 되뇌는 말. 두고 보자. 갚아 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보통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버릇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라 외쳐 보지만 상대에겐 빈틈이 보이지 않고 힘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새로 생기는 ‘두고 볼 일’ 때문에 복수의 다짐은 색이 바래고 기억은 흐릿해진다. 그러니 ‘두고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다’는 말이 있는 거겠지. 지금 당장 책임 있게 결정하는 것을 피하고 싶을 때 하는 말도 ‘일단 두고 봅시다’이다. 방치. 뒤로 넘김. 복수를 다짐하거나 책임을 뒤로..

연재칼럼 19:24:17

여물다 [말글살이]

여물다 [말글살이] 수정 2025-08-28 18:36 등록 2025-08-28 18:07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공중목욕탕에 가면 냉온욕을 한다. 냉탕에서 시작해 온탕으로 1분씩 왔다 갔다 하기를 7회 정도 하다가 냉탕으로 끝낸다. 진득하게 몸을 불리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찰방거리며 드나드는 모습이 꼴불견이겠지만, 온탕에만 있는 것보다 뜨겁고 차갑고를 번갈아 하면 피로가 풀리고 피가 잘 돌며 살갗에 찰기가 흐르고 근육이 딴딴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작년, 경기 가평군 율길리 포도 농사꾼인 은사님한테서 얻어온 포도 삽목 두그루에서 처음으로 열매가 달렸다. 딸랑 두송이였지만, 어찌나 귀엽던지 집을 나설 때마다 쳐다보며 이번 추석에는 손수 기른 포도를 먹을 수 있..

연재칼럼 2025.08.28

꼴리다

꼴리다 [말글살이] 수정 2025-08-21 18:44등록 2025-08-21 17:07 클립아트코리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틈날 때마다 말실수를 한다. 평소에 배알이 꼴린 사람에게는 기어코 말로 티를 낸다. 평생 전횡과 권세를 누려온 어느 교수가 연구비를 받게 된 나에게 축하한다면서 밥과 술을 사라고 했다. 내 목줄을 쥔 그는 제자 대여섯명까지 불러 밥과 술을 흥건하게 먹고 마셨다. 이제는 이 무도한 자와 헤어지겠구나 싶었지만, 노래방엘 가자고 한다. 나는 힘 있는 자 앞에선 참을성이 넘쳐나는 인간인지라 겉웃음을 치며 그러자고 했다. 한시간 반이 되어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하자 공짜 음주가무에 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기름진 얼굴을 디밀며 “김 교수, 한..

연재칼럼 2025.08.26

눈치

눈치 [말글살이]수정 2025-07-31 18:49등록 2025-07-31 16:58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나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상대방은 시선과 표정과 몸놀림으로 신호를 보내는데, 당최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 줬으면 할 땐 눌러앉고, 와 줬으면 할 때 가지 않는다. 겉으로 하는 말만 듣고 찧고 까불다가 후회를 한다. 가끔 넘겨짚어 보지만 헛다리 짚기 일쑤. 늘 그런 것도 아니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선 눈치가 8단이다. 목말라 보이면 물을 따르고 더워 보이면 부채질을 하며 추워 보이면 군불을 지핀다. 염화미소, 말이 없이도 마음이 전해지니 화기가 애애하고 겉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말도 어찌나 예쁘고 싹싹한지 ‘나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하면서 몰래 놀란다.(‘약간의’ 기..

연재칼럼 2025.08.15

뗑깡

뗑깡 [말글살이] 수정 2025-08-14 18:54 등록 2025-08-14 18:52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 어른이 돼도 마음 씀씀이가 달라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기꺼이 수긍하는 쪽인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쪽인가. 나는 아무래도 후자다. 뾰로통한 얼굴로 ‘사람이 왜 저렇게 멍청할꼬’ ‘왜 저렇게 사소한 일에 매달릴꼬’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입을 삐죽거린다. 어쩌겠나, 속 좁게 태어난 걸. 문제는 그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질 때 생긴다. 심사가 단단히 틀어지면 급기야 ‘뗑깡’을 부리게 된다. ‘뗑깡’은 ‘간질’을 뜻하는 일본 한자어 ‘텐칸’(전간, 癲癇)에서 ..

연재칼럼 2025.08.15

다시, 한자 문제(2) [말글살이]

다시, 한자 문제(2) [말글살이] 수정 2025-07-17 20:11 등록 2025-07-17 20:08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와 마찬가지로, 말에서 뜻을 가진 가장 작은 단위는 ‘형태소’이다. ‘비’는 뜻을 갖기 때문에 형태소이다. ‘하늘’은 더 쪼개면 뜻을 갖지 않으므로 ‘하늘’ 전체가 형태소이다. ‘밤하늘’은 ‘밤’과 ‘하늘’이라는 형태소 두개가 합쳐진 말이다. 한자로 된 단어는 어떨까? 한자는 각각이 뜻을 갖고 있으니 형태소이다. 학교에서는 ‘독서’라는 말이 ‘독’과 ‘서’라는 형태소로 나뉜다고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독’이나 ‘서’라는 발음보다는 그 뒤에 숨어 있는 뜻이다. 지금은 어른이 아이를 윽박지르면서 “‘讀書’가 뭔지 읽어봐!” 하는..

연재칼럼 2025.07.19

다시, 한자 문제 [말글살이]

다시, 한자 문제 [말글살이] 수정 2025-07-10 18:49 등록 2025-07-10 18:19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자 문제 앞에만 서면 늘 머뭇거려진다. 영어 실력을 앞세우는 시대에 쓸모없는 한자라니, 고루하고 철 지난 얘기 같아 보인다. 더욱 머뭇거려지는 건 한자는 인간이 어휘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과 함께, 어휘력, 문해력, 사고력, 고등교육, 문화 전승, 민주평등교육 등을 어떻게 키우고 확장할지에 대한 이견들이 얽히고설킨 문제라서 어느 하나를 건들면 다른 하나가 고개를 쳐드는 복잡다단한 주제이다. 단순히 ‘필요해, 필요 없어? 가르칠 거야, 말 거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논의의 대전제이자 법적..

연재칼럼 2025.07.12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수정 2025-01-08 12:55 등록 2025-01-08 11:30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13회 전라로 거울 앞에 선 데미 무어는 자신의 몸을 본다. 형광등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 푸석푸석한 피부와 머리칼, 깊어진 주름, 늘어진 가슴이며 처진 엉덩이를 체념한 듯 쏘아본다. 장면을 바꿔, 데이트를 위해 한껏 차려입은 데미 무어가 거울 앞에 선다. 기대감과 약간의 흥분이 수증기처럼 거울에 어린다. 핑크색 글로스를 발랐던 입술을 지우고 새빨간 립스틱을 발라보고, 스카프로 목주름을 가려보고, 화장과 의상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지만 그래도 거울 속 자신은 최선이 아니다. 좌절한 그녀는 화장을 문질러 지우고, 어둠 속에 홀로 웅크려 앉은 채 집 밖으로 나가길 포기한다. 지난 ..

연재칼럼 2025.07.12

위험 안고 앞으로…김규진·김세연 부부의 ‘용기’를 질투하다

위험 안고 앞으로…김규진·김세연 부부의 ‘용기’를 질투하다수정 2024-07-24 14:02등록 2024-07-24 11:30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2회 지난해 7월 1일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김규진(오른쪽), 김세연 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이날 열린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라니’ 임신 사실을 공개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누군가의 글, 누군가의 노래, 누군가의 연기를 경유해 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모르는 타인의 사적인 삶을 사랑하게 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의 삶 자체가 상징이고, 현상이며, 운동이어야 할 것이며, 사적인 삶에서 그 자신의 선택과 태도가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

연재칼럼 2025.07.12

이영지의 큰 키, 큰 목소리…그리고 큰 배포를 질투하다

이영지의 큰 키, 큰 목소리…그리고 큰 배포를 질투하다수정 2024-07-10 15:33 등록 2024-07-10 11:30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1회 래퍼 이영지가 지난 2월 1일 강원 강릉시 올림픽파크 특설무대에서 열린 2024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대회 폐회식에서 축하 공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기자신을 긍정하는 일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숙제 같다. 모든 선량한 매체가, 성공한 이들의 자기계발서가, 젊고 아름다운 아이돌 그룹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라”를 슬로건처럼 외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쉬운 일이던가. 거울을 곰곰이 들여다본다. 주근깨, 각진 턱, 솟아오른 승모근, 저주받은 운동신경, 옹졸한 성질머리, 부족하기 짝이 없는 눈치코치까지 고치고 싶은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

연재칼럼 2025.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