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말글살이] 가짜와 인공

[말글살이] 가짜와 인공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는 게 가짜 같을 때가 있다. ‘가짜’는 ‘진짜가 아닌 것’이다. 맞다. 하지만 어떤 게 진짜가 아니어야 가짜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진짜 총’의 자격은? 총의 모양을 띠고 손잡이와 방아쇠가 있고 쇠로 만들었으며 총알이 날아가 사람을 죽이는 데 쓴다. 그렇다면 ‘가짜 총’은 모양은 같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기능이 없거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이리라.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대. 모양이 달라도 ‘가짜 총’이 될 수 있다. 강도가 ‘지갑을 내놓지 않으면 쏴 버릴 거야’라고 하면서 뒤통수에 총 대신 볼펜을 들이댄다면, 지갑을 꺼내지 않을 재간이 없다. 볼펜이 총. 주먹을 쥔 채로 엄지와 검지를 곧게 뻗어 ㄴ자를 만..

연재칼럼 2023.12.08

[말글살이] 상석

[말글살이] 상석 1979년 12월12일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앞줄 왼쪽 다섯째)·노태우(넷째) 등 신군부 주축 세력은 이튿날 보안사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5공화국전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신통하게도 같은 모양의 의자이지만 어디가 상석이고 어디가 말석인지 금세 안다. 문이나 통로에서 먼 쪽. 등을 기댈 수 있는 벽 쪽. 긴 직사각형 모양의 회의실에서 윗사람은 짧은 길이의 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평지인데도 상석(上席), 윗자리를 귀신같이 안다. 왜 그런가? 우리는 ‘힘’이나 ‘권력’을 ‘위-아래’라는 공간 문제로 이해한다. 힘이 있으면 위를 차지하고 힘이 없으면 아래에 찌그러진다. 이런 감각은 우연히 생긴 게 아니다. 숱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목격하면..

연재칼럼 2023.12.01

[말글살이] 반동과 리액션

[말글살이] 반동과 리액션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 현대사에서 ‘반동’이란 말은 혁명과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지난날 반공드라마에 흔히 쓰이던 ‘반동 종간나 ××’라는 말은 공산혁명에 반대하고 봉건질서를 옹호하는 사람에게 붙이던 경멸의 딱지였다. 하지만 애초에 ‘반동’은 자연과학(물리학) 용어였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알려진 뉴턴의 제3법칙이 대표적이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가하면, 힘을 받는 물체도 힘을 가하는 물체의 반대 방향으로 같은 크기의 힘을 가한다’는 것이다. 정치 영역으로 확장된 ‘반동’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방해하고, 낡고 오래되고 사라져야 할 구습을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이자, 자기 이익이나 관행에 집착하는 자를..

연재칼럼 2023.11.24

[말글살이] 내색

[말글살이] 내색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얄궂다. ‘내-색(色)’. 색을 냄, 색을 내보임, 마음에 느낀 걸 얼굴에 드러냄. 그런 뜻이라면 ‘색내’나 ‘색냄’이라 해도 됐을 텐데, 굳이 동사 ‘내다’를 ‘색’ 앞으로 보냈다. ‘놀토, 먹방’ 같은 말이 만들어질 조짐이 오래전부터 있었나 보다. 무술에서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격동을 겉으로 드러내지 말라고 한다. 두렵지만 두려운 내색을 하지 말고, 즐겁지만 즐거운 내색을 하지 말라는 것. 평정심과 항구여일의 풍모를 잃지 말라는 것. 무표정한 얼굴(포커페이스)을 하라는 게 아니다. 변함없는 얼굴을 하라는 것이다. 평소에 웃는 얼굴이라면 싫은 사람이 나타나도 웃고, 늘 째려보는 얼굴이라면 두려운 사람이 나타나도 째려보라는 ..

연재칼럼 2023.11.17

[말글살이] 몰래 요동치는 말

[말글살이] 몰래 요동치는 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하는 공부도 장쾌하지 못하여 ‘단어’에 머물러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말에도 별 관심이 없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뜻이 한발짝 옆으로 옮아간 ‘물건값을 깎다’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사과’에 쓰인 ‘깎다’ 정도. 연필 깎는 칼과 사과 깎는 칼은 다르다. 연필 깎는 칼은 네모나고 손가락 길이 정도인 데다가 직사각형이다. 과일 깎는 칼은 끝이 뾰족하고 손을 폈을 때의 길이 정도이다. 연필은 바깥쪽으로 칼질하지만, 사과는 안쪽으로 해야 한다. 연필은 집..

연재칼럼 2023.11.11

[말글살이] 주현씨가 말했다

[말글살이] 주현씨가 말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생존자 이주현씨는 10·29 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이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이 짧은 5분 안에 제 마음과 생각을 다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못다 한 말들은 그냥 다 없는 말이 되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분향소보다는 이태원을 자주 갔습니다. 그 참사 현장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고 저라도 선명히 계속 기억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의 벽 앞에도 자주 갔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메모지에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말 몇 마디로, 몇 줄의 문장으로 어떻게 이 마음을 다 표현합니까.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분향소 앞에서 그분들의 영정을 마주 볼 때는 한 가지 말을 되뇔 수 ..

연재칼럼 2023.11.03

‘희망’은 무엇을 하는가

‘희망’은 무엇을 하는가 입력 : 2023.10.03. 20:25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편집장 “정치인과 지식인 모두가 기후위기를 심각하다고 부르짖지만, 뒤돌아서는 평소대로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소비한다. 로이 스크랜턴은 우리가 기후위기를 해결하고 문명과 인류를 이어갈 확률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혁신이 이어지고 경제가 성장해도 미래는 암울하다. 아니, 더 암울한데,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전 지구적 기후위기는 바로 이런 자본주의적 혁신과 성장에서 오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전망도 과장되어 있다. 우리는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품위 있게 살아야 하는데, 그 길은 죽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애착이 가는 것,..

연재칼럼 2023.11.02

뉴스는 빨라야 할까

뉴스는 빨라야 할까 입력 : 2023.10.31 20:23 수정 : 2023.10.31. 20:24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편집장 신문(新聞)에 대한 오랜 개념 중 하나는 ‘새로운 소식을 신속, 정확하게 널리 알리는’ 정기 간행물이다. 신문은 이미 아는 이야기, 즉 구문(舊聞)과 대비되는 속도의 매체라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호외(號外)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윤전기를 세웠다”는 표현이 긴급한 뉴스를 대신하던 시절 역시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이런 맥락 때문에 종이 신문과 인터넷 신문은 경쟁이 안 되고, 종이 신문은 사양 산업이라는 통념이 생겼다. 정말, 신문 산업의 미래는 신속성의 문제일까. 주지하다시피 현실이 모두 뉴스가 되지는 않는다. 무엇이 현실이고 사실인가 자체가 논쟁거리다. 뉴스에는 ‘..

연재칼럼 2023.11.02

[말글살이] 까치발

[말글살이] 까치발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사흘 앞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 입구 바닥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안내하는 동판이 설치돼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신호등 앞에서 한 노인이 뒤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종아리 근육을 강화하고 혈액 순환을 원활히 하며 하지정맥류를 예방하는 만병통치의 까치발 운동. 속으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붙이고 있겠지. 새들은 모두 뒤꿈치를 들고 다닌다. 까치를 자주 봐서 까치발이려나, 한다. 제비발이나 까마귀발이라 해도 문제없다. 네발짐승들도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 힘만으로 걷는다. 네발이니 땅에 닿는 면적이 좁아도 괜찮다. 강아지만 봐도 발꿈..

연재칼럼 2023.10.27

[말글살이] 조의금 봉투

[말글살이] 조의금 봉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 (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상한 일이지만,..

연재칼럼 202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