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06

[말글살이] 예민한 ‘분’

[말글살이] 예민한 ‘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믿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갑절은 예의 바르다. 몸에는 온통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습이 배어 있어 예의범절에 어긋난 언행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결단코 음식을 먼저 먹지 않는다. 이 ‘예의범절’이란 녀석은 또렷하기보다는 막걸리처럼 뿌옇고 흐릿하다. 법보다는 관행에 가깝고 경험에서 비롯된 게 많아 사람마다 기준도 들쑥날쑥하다. 감각에 가까운지라,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몸과 마음이 곧바로 익숙한 쪽으로 쏠린다.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가끔 무엇이 예의 있는 언행일지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어른 두분을 모시고 식당에 갔다고 치자. ..

연재칼럼 2023.07.18

[말글살이] 망신

[말글살이] 망신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마음은 몸과 이어져 있다. 볼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건만, 몸이 티를 내니 숨길 수가 없다. 기쁘면 입꼬리를 올리고, 슬프면 입술을 씰룩거린다. 실망하면 어깨가 처지고, 부끄러우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분하면 어금니를 깨물고 긴장하면 몸이 굳는다. 두려우면 닭살이 돋는다. 몸은 마음이 하는 말이다. ‘망신’(亡身). 몸을 망가뜨리거나 몸이 망가졌다는 뜻이었으려나. 고행처럼 몸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어 육신의 욕망을 뛰어넘고 참자유에 이르겠다는 의지였으려나.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몸을 잊음으로써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겠지. 오체투지, 단식, 묵언, 피정, 금욕도 망신(고행)의 일..

연재칼럼 2023.07.18

[말글살이] 말 많은 거짓말쟁이 챗GPT, 침묵의 의미를 알까

[말글살이] 말 많은 거짓말쟁이 챗GPT, 침묵의 의미를 알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인공지능이 인간 언어에 육박할 수 있게 된 건 인간이 말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패턴의 발견. 패턴은 반복적 사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일정한 양식이자 경향. 어떤 상황을 말로 표현한다고 해 보자. 딱 맞는 하나의 표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열려 있는 것도 아니다. ‘밥’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떠올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장은 패턴의 조합이다. 패턴은 유일과 무한대 사이에 난 오솔길. 자기 팔꿈치는 물지 못한다 했던가. 인간은 그 패턴이 무엇인지 소상히 알 수 없다. 말은 술술 하지만 그걸 보여 달라고 하면 난처해진다. 인공지능은 그걸 ..

연재칼럼 2023.07.18

‘극단적 선택’, 극단도 선택도 아니다

‘극단적 선택’, 극단도 선택도 아니다 입력 : 2023.07.12. 03:00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편집장 1803년 미국 의회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準州)를 사들였다. 당시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미시시피강에서 로키산맥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탐사할 책임자로 29세의 메리웨더 루이스(1774~1809) 대위를 임명했다. 타고난 총명함과 추진력을 갖춘 루이스 대위는 지리학, 자연사, 의학, 식물학, 천문학을 공부하여 미국 지도를 만들었다. 그는 선주민 부족수, 그들의 언어, 전통, 기념물, 농업, 유행병, 법, 관습 등 각 지역의 토양과 지형, 식물과 동물, 광물과 화산 지형까지 성공리에 조사를 마쳤다. 적절한 조증(躁症), 성실성, 진취력, 판단력, 용기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만이..

연재칼럼 2023.07.15

[김탁환 칼럼] 물살이 곁에서 상상하다

[김탁환 칼럼] 물살이 곁에서 상상하다 김탁환 | 소설가 글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곁으로 가고자 애쓰라고 답한다. 내 문장으로 담고 싶은 인간의 곁, 시간의 곁, 공간의 곁으로 가서 함께 머물며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 다음 쓰라는 것이다. 곁으로 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연락해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과는 어떻게 만날 것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과 만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무엇이 같고 다를까. 원하는 시간의 곁으로 가는 것 역시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때나 이미 지나가 버린 어느 때를 파악하려면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원하는 장소로 가는 것 역시 시간을 들여 준비해야 하고 적..

연재칼럼 2023.07.15

[말글살이] 사투리 쓰는 왕자

[말글살이] 사투리 쓰는 왕자 왼쪽부터 의 경상도 사투리판 , 전라도 사투리판 , 제주도 사투리판 .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생각과 취향은 어디에서 올까? 부질없는 욕심은 스스로 자라나는 걸까? 돈의 존재가 돈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듯, 표준어의 존재는 표준어에 대한 열망을 부른다. 표준어 중심의 사회는 표준어를 추앙하게 만들었다. 사투리는 보존 대상일지는 몰라도, 욕망의 대상은 아니다. 사투리는 반격과 복권의 기회를 얻을까? 2년 전 포항의 독립출판인인 최현애씨는 여러 소수 언어로 를 번역하는 독일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 ‘경상도 사투리판’ 를 펴냈다. 그해 가을, 언어학자 심재홍씨는 ‘전라도 사투리판’ 를 냈다. 지난해엔 제주에서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이광진씨가 ‘제주도 사투리..

연재칼럼 2023.07.14

[말글살이] 말의 적

[말글살이] 말의 적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연필이 한 자루 있다’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소금이 한 톨 있다’ ‘사람이 한 명 있다’라는 문장들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그렇다. ‘1’. 수는 추상화의 끝판왕이다. 숫자가 없다면, ‘연필=강아지=소금=사람’이라는 등식을 상상할 수 없다. 수는 이질적인 것들 속에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 공통점을 매개로 새로운 관계로 만든다. 우리는 수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수량화에 가장 적합한 체제다. 인간을 비인격적 숫자로 등치시키고 대체 가능성을 점점 확대해 왔다. ‘인력수급’만 잘 되면 그만. 누구든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성과지표는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니, 수량화야말로 사회의 핵심 작동방..

연재칼럼 2023.07.14

[말글살이] 수능 국어영역

[말글살이] 수능 국어영역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대통령이 부럽다. 말도 못하게 부럽다. ‘말은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보유한 권력의 무게만큼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리도 밝고 명쾌하게 보여주다니. 보스의 힘을 확인하는 방법은 깨알처럼 작디작은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것. ‘수능 문제를 쉽게 내라’는 교지를 따르지 않은 담당 국장을 경질하고 교육과정평가원도 감사를 한다니 ‘교육개혁의 의지’에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 학생에겐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일타강사처럼 말하자면, 올해 수능 국어영역은 무조건 교과서 내에서 난다. 교과서만 보라. 식은 죽 먹기다. 다만, 볼 책이 좀 많다. 국어 교과서가 12종이고, 문학이 10종, 독서가 6종, 화법과 작문이 5종, 언어와 매체가 ..

연재칼럼 2023.07.14

[말글살이] 말 많은 거짓말쟁이 챗GPT, 침묵의 의미를 알까

[말글살이] 말 많은 거짓말쟁이 챗GPT, 침묵의 의미를 알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인공지능이 인간 언어에 육박할 수 있게 된 건 인간이 말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패턴의 발견. 패턴은 반복적 사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일정한 양식이자 경향. 어떤 상황을 말로 표현한다고 해 보자. 딱 맞는 하나의 표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대로 열려 있는 것도 아니다. ‘밥’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떠올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장은 패턴의 조합이다. 패턴은 유일과 무한대 사이에 난 오솔길. 자기 팔꿈치는 물지 못한다 했던가. 인간은 그 패턴이 무엇인지 소상히 알 수 없다. 말은 술술 하지만 그걸 보여 달라고 하면 난처해진다. 인공지능은 그걸 ..

연재칼럼 2023.06.18

유서를 읽는다 [말글살이]

유서를 읽는다 [말글살이]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 양회동(50)씨 빈소가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조문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그의 유서를 읽는다. ‘혼자 편한 선택을 한지 모르겠다’는, 말문이 막히는 글을 읽는다. 그의 죽음이 우리 모두의 책임처럼 느껴지지만, 무엇을 느끼든 소용없다. 남겨진 자는 누구도 그에게 도달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생을 던지며 쓴 글을 마주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부족함’ 같은 것. 그의 좌절과 분노, 책임감에 미치지 못했다는….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저는 자랑스러운 민주노총 강원건설지부 양회동입니다. 제가 오늘 분신을 하게 된 건 죄 없..

연재칼럼 2023.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