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128

[말글살이] 까치발

[말글살이] 까치발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사흘 앞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 입구 바닥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안내하는 동판이 설치돼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신호등 앞에서 한 노인이 뒤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종아리 근육을 강화하고 혈액 순환을 원활히 하며 하지정맥류를 예방하는 만병통치의 까치발 운동. 속으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붙이고 있겠지. 새들은 모두 뒤꿈치를 들고 다닌다. 까치를 자주 봐서 까치발이려나, 한다. 제비발이나 까마귀발이라 해도 문제없다. 네발짐승들도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 힘만으로 걷는다. 네발이니 땅에 닿는 면적이 좁아도 괜찮다. 강아지만 봐도 발꿈..

연재칼럼 2023.10.27

[말글살이] 조의금 봉투

[말글살이] 조의금 봉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 (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상한 일이지만,..

연재칼럼 2023.10.20

[말글살이] 부사, 문득

[말글살이] 부사, 문득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부사(副詞)는 이름부터 딸린 식구 같다. 뒷말을 꾸며주니 부차적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더부살이 신세. 같은 뜻인 ‘어찌씨’는 이 품사가 맡은 의미를 흐릿하게 담고 있다. 글을 쓸 때도 문제아 취급을 당한다. 모든(!) 글쓰기 책엔 부사를 쓰지 말라거나 남발하지 말라고 한다. 좋은 문장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동사)로만 되어 있다는 것. 부사는 글쓴이의 감정이 구질구질하게 묻어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하면서도 마치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단다. (그러고 보니 이 칼럼의 분량을 맞출 때 가장 먼저 제거하는 것도 부사군.) 그래도 나는 부사가 좋다. 개중에 ‘문득’을 좋아한다. 비슷한 말로 ‘퍼뜩’이 있지만, 이..

연재칼럼 2023.10.20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날이 밝으면 어제와 다른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하지만 현실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제자리걸음.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숙명이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인가 보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에는 지금까지 해온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일에 대한 겸손함의 표현이자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원의 반지름은 여기까지! 배울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니건만, 하필 도둑질이라니. 말이란 참 짓궂다. 도둑질은 직업인가 버릇인가. 물건을 훔치되 잡히지 않으..

연재칼럼 2023.10.14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말글살이]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말글살이] 게티이미지뱅크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니던 청바지가 버스에 앉는데 찍 하고 찢어졌다. 천을 덧대어 오버로크해서 버텼으나, 오래 못 가 뒷무릎까지 찢어졌다. 아깝더라도 버릴 수밖에.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김수영)지만, 언젠가는 버려야 할 때가 온다. 한글 자음 이름도 그렇다. 한글 창제 후 백년쯤 지나 최세진은 어린이용 한자학습서 ‘훈몽자회’를 쓴다. ‘天’이란 한자에 ‘하늘 천’이라고 적어두면 자습하기 편하겠다 싶었다. 명민한 최세진은 이름만 배워도 그것이 첫소리와 끝소리에서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리을, 비읍’처럼 ‘이으’의 앞뒤에 ㄹ, ㅂ을 붙이면 첫소..

연재칼럼 2023.10.06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맘껏 뛰노는 곳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맘껏 뛰노는 곳 전주 ‘야호 맘껏 숲놀이터’.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노는 방법을 궁리한다. 일상건축사사무소 제공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 편집주간 전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여행과 답사의 경계가 늘 불분명하다. 동행자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전주의 대명사인 한옥마을과 요즘 뜨는 문화 플랫폼 팔복예술공장에 들렀고 비빔밥과 콩나물국밥도 맛봤지만, 잠깐의 틈을 포착해 점찍어둔 장소를 둘러보는 데 성공했다. 덕진공원 어귀에 새로 생긴 ‘야호 맘껏 숲놀이터’다. 야호, 맘껏! 이름만 들어도 신나는 이 놀이터는 유니세프의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은 전주시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함께 비용을 마련해 만들었다. 어린이에게 스스로 도시 공간을 ..

연재칼럼 2023.10.03

[말글살이] 피동형을 즐기라

[말글살이] 피동형을 즐기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원고가 마무리되셨는지요?’ 오늘도 어떤 분에게 원고를 독촉하면서 피동형 문장을 썼다. ‘마무리하셨나요?’라 하면 지나치게 채근하는 듯하여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나도 매번 독촉 문자를 받는데 열이면 열 ‘언제쯤 원고가 완성될까요?’ 식이다. ‘원고 완성했어요?’라 하면 속이 상할 듯. 비겁한 피동 풍년일세. 한국어 문장에 대한 가장 강력하면서도 근거 없는 신화가 ‘피동형을 피하라’라는 것. 글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를 한번쯤 들었을 것이다. ‘능동형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피동형은 우리말을 오염시킨다’, ‘우리말은 피동형보다 능동형 문장이 자연스럽다’, ‘피동형은 영어식 또는 일본어식 표현의 영향이다’. ‘능동형이 자연스..

연재칼럼 2023.09.23

[말글살이] 이중피동의 쓸모

[말글살이] 이중피동의 쓸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는 특유의 저 말투로 어떤 장면을 실감나게 강조했다. 저래야 영화의 맛이 살았다. 효과 만점. 모든 표현에는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다. 신화처럼 완고하게 전해오는 명령이 있다. ‘이중피동을 피하라!’ 한 번으로 족한데 두 번이나 피동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정말 그런가? 안 써도 되는데 굳이 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설명을 못 할 뿐이지 쓸모없는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옛말에는 진정한 이중피동, 즉 피동접사를 겹쳐 쓰는 말이 꽤 있다. 예를 들면, ‘닫히이다, 막히이다, 잊히이다, 눌리이다, 밟히우다, 잡히우다’. ‘닫히다, 막히다, 잊히다’ 등은 오래전부터 피동사로 쓰였다..

연재칼럼 2023.09.15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말글살이] 배운 게 도둑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날이 밝으면 어제와 다른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하지만 현실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제자리걸음.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숙명이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인가 보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에는 지금까지 해온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일에 대한 겸손함의 표현이자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원의 반지름은 여기까지! 배울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니건만, 하필 도둑질이라니. 말이란 참 짓궂다. 도둑질은 직업인가 버릇인가. 물건을 훔치되 잡히지 않으..

연재칼럼 2023.09.09

[말글살이] 왕의 화병

[말글살이] 왕의 화병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나같이 온순하고 청순하며 버들강아지처럼 보드라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눈엔 쌍심지를 돋우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끝마다 쐐기벌레처럼 톡톡 쏘아붙이며 화내는 사람을 만나면 화덕 위에서 졸아붙고 있는 청국장처럼 몸이 쪼그라들고 속에선 매캐한 탄내마저 나는 듯하여 웬만하면 초장부터 안 만나는 쪽이 심신건강에 유익하렷다.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은 주변 인심을 잃을지는 몰라도 자기감정을 시원 방탕하게 배설하니 무병장수할 공산이 큰 반면에, 당하는 사람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삭일 길 없어 몸에선 열이 나고 초점 잃은 눈으로 기운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내 허공 위로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답답한 가슴을 팡팡 치기도 ..

연재칼럼 2023.09.09